인간에게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은 보다 더 행복해 질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푼다. 높은 산, 심산유곡… 한적한 산길, 폭포사이를 날아 북극의 오로라… 땅끝 어딘가에 있을 피안의 세계를 찾아간다면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 우리의 보는 눈은 늘 그저 그렇다. 오늘이 어제같은, 같은 눈 높이에서 무료한 세상보기에 지쳐갈 뿐이다. 간혹 음악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준다. 어쩌면 인간만이 보유한 날개인지도 모르지만, 음악을 통하여 인간은 잠시나마 피곤한 육체의 시름을 잊고 영혼의 날개를 펴게된다. 음악으로 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하늘을 나는 음악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림스키콜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등이다. ‘왕벌의 비행’은 너무도 유명한, 왕벌의 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하늘을 왕왕거리며 나는 모습이 시원하며 바이올린의 떨림이 왕벌의 날개가 연상되는, 다소 귀여운 작품이다. ‘발퀴레의 기행’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주제음악으로도 사용될만큼 장쾌하고도 행진곡풍의 시원한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영화나 TV의 스페이스 쉽(우주선)등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꼭꼭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는 작품으로, 행진곡이라하기에는 다소 날렵하고, 작렬하는 폭발음이 어딘가 용맹성이 느껴지는 장쾌한 비행음악이다.
바그너(獨, 1813-1883)는 이 작품을 그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4부극)’ 제 2부 ‘발퀴레’ 3막에 등장시키고 있는데 전주곡에 해당하는 곡으로 주신 보탄의 딸 9명의 발퀴레(신)들이 천마를 타고 부상 전사를 방패로 나르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발퀴레들의 용감하게 하늘을 나는 모습이 거침없고, 자유로운 선율로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음악은 아마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아니더라도 전쟁광 아돌프 히틀러가 전쟁에 사용했던 음악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음악중의 하나일 것이다. 바그너를 좋아했던 히틀러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에게 바그너의 음악을 꼭꼭 들을 것을 종용했는데 이 ‘발퀴레의 기행’이야말로 가장 용기를 북돋울만한 용감무쌍하면도 씩씩한 독일인의 기상을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히틀러가 선호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격정’은 바그너 음악의 중요한 모티브(동기)였다. 격정없는 음악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일의 바그너 만큼 음악이 하나의 커다란 불꽃, 격정이 활화산처럼 분출되고 있는 작품도 없었다. 물론 격정은 바그너가 추구한 진정한 의도은 아니었다. 격정은 동기였을뿐 음악을 통한 위안, 구도의 요소야 말로 바그너가 추구한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음악적 구도’라고 하는 다소 애매한 문구가 암시하듯 무엇이 진정한 구도인가를 구분지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바그너 예술의 역설이었다. ‘탄호이저’, ‘루벨링겐의 반지’ ‘파르지팔’… 이들은 모두 내용상으로는 종교적, 도덕지향적인 작품들이다. 여인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랑의 동기도 그렇거니와 성 금요일의 기적을 그린 ‘파르지팔’ 또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이 들어있는 작품이었다. 문제는 플롯이 아니라 음악의 표현이었다. 바그너 음악에 표출되어 있는 야성적인 요소는 바바리안의 피, 용맹성 그것이었다. 그 주체할수 없는 야성과 전쟁의 광기, 이 것이 십자가(기독교) 앞에서 무조건적인 희생과 함께 했을 때 일으키는 그 무한대의 종교적 광기, 열정의 크기는 가히 전 독일을 삼키고도 남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이 독일 국수주의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히틀러의 광기를 자극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기독교계는 물론이거나 당시 낭만주의의 전체를 삼키고도 남을 용광로나 다름없었는데 유럽의 음악은 바그너의 출현과 더불어 그 반세기 이상을 바그너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히틀러로 인하여 정점을 이루고 히틀러로 인하여 그 마감을 고하게 되었다. 요즘에야 바그너의 음악을 다소 과대망상주의로 격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바그너야말로 음악사에서도 가장 용사다웠다. 그가 남긴 4부작 ‘루벨린겐의 반지’는 그 예술성은 차치하고라도 희소가치 하나만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클래식 역사에서 16시간은 커녕 단 8시간이상을 넘어가는 공연 작품은 없었고 단 2시간도 버티기 힘든 요즘의 아이디어로서는 가히 상상조차 할 수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독일 예술은 강했고, 음악에도 미쳐 있었다. 그런의미에서 바그너는 그 치열한 투쟁에 있어서 이미 그 추구하던 바 구도의 목적 절반은 달성한 셈이었다.
구도(求道)… 이는 바그너가 전 생애를 걸쳐 희생한, 예술에 앞서 선행했던 최고의 목표였다. 음악에서의 수도자, 바그너는 그 예술의 모토를 단순히 꽃을 감상하듯, 감정적 희롱으로 삼지 않았다. 최고의 목표인 도를 이루고, 인격(도덕) 완성에 이바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인해 계몽음악이라고 낙인찍혀 순음악파들에게 반대를 사긴 했지만 때로는 폭발하고 때로는 장엄하게 도(道)로 향해 전진하는 감성의 합일은 예술사에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발퀴레의 기행’은 단순한 용사의 행진곡이 아니었다. 독일의 초인사상과도 합일되는, 어쩌면 바바리안들이 아니면 생각해낼 수 없는 가장 용맹스러운 음악의 표본이었다. 이 음악은 비행음악이면서도 장중한 맛을 과시하고 있는 데 강철같은 투지, 결코 물러섬없는 용맹, 그 의지의 비약은 음악으로의 승리, 강직한 독일예술의 정점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치 타이탄들의 대행진곡이라고나할까. 오늘 마음의 불이 꺼져 있는 자들은 ‘발퀴레의 기행’으로 새로운 용맹, 투지를 불사를 수 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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