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롱스에 있는 MS 142 중학교에 근무하는 조미경 교사(45)는 별난 교사이다.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이민온 1.5세인 그는 이민 초기에 영어를 못해 방황했다는데 지금은 미국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하고 있다. 어려서 이민을 온 1.5세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말을 잘 한다. 한국말을 잘할 뿐 아니라 영어만 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도 겸하고 있다. 그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성과 집념은 대단하다.
조교사는 미국속의 아프리카 오지와 같은 브롱스의 흑인지역에 들어가 10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교사들의 교육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부하기 일쑤인 이런 환경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가히 신앙적 차원의 희생이 필요했다.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흑인학생들을 한국에 데려가서 그들의 인생에 생생한 체험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쌈지돈을 털고 캔디장사도 서슴치 않는다. 학
생들에게 한국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깊은 연민으로 어루만져 주어 한국어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만들고 있다. 그는 한 마디로 「한국어 전도사」인 셈이다.조교사는 12살 때인 1972년 부모를 따라 이민하여 뉴저지의 모리스카운티에서 자랐다. 그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6학년에 들어가 중고교와 대학을 다녔다. 한국에서 명랑하고 발랄했던 그는 미국에 와서 영어를 따라가지 못해 주눅이 들었고 그 때문에 갈등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고 영어를 배워서 한국에 돌아가 시골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대학을 나온 후 곧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서 기르던 그는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인사회에서 어려운 이민자를 돕기 위해 브롱스에 있는 리만 칼리지에서 소셜웍을 공부했다. 그런데 워낙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던 그는 교육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서는 영어 리딩(Reading)으로 석사를 했다. 그리고 또다시 ESL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사 자격증도 땄다. 때마침 브롱스의 MS 142 중학교에서 Reading 교사가 필요하다는 교장의 요청을 받고 이 학교에 부임한 것이 이제 10년이 됐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어려움이란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모두 흑인과 히스패닉이었고 학생과 교사를 통틀어 아시안이라곤 조교사 뿐이었다. 학생들이 「칭,충,챙」 하면서 놀려대는 것은 물론이고 공부를 따라오지 않고 수업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동료 교사들 중에는 이런 고통 때문에 정신병원에까지 다닌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조교사는 너무 힘들어 집에 오면 벽을 보고 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했다.그는 몇 번이나 학교를 그만 둘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마음을 다잡아 이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흑인학생들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흑인들은 자신들이 억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거부한다는 것, 즉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억압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며 흑인이든 백인
이든 아시안이든 이 가치관을 가르치는 사람은 억압자의 앞잡이로 본다는 것이었다. 또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학업에 관심이 없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롤 모델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파악한 이상 말썽을 부린다고 화만 낼 수는 없었다.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따뜻하게 대해 주었더니 학생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교사를 중국인으로 알고 있던 그들이 중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하고 한국말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이 학교의 한국어 교육은 이렇게 2001년부터 시작됐다. 조교사는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학생을 모아 방과후에 자원봉사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2년 전 아시아 문화에 호감을 가진 교장이 새로 부임한 후 학교측의 배려로 한국어 교육을 정규 수업시간 보다 1시간 전인 오전 7시에 영교시 수업으로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교사는 1년에 한두번은 한복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여 큰 절과 무용, 장고춤을 시범하는 등 한국문화를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보여준다고 한다. 김밥을 준비해 가서 전교 학생과 교사들에게 나누어 준다. 작년 2월에는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 10여명을 데리고 플러싱에 가서 한국음식을 사먹이기도 했다. 또 한달 전에도 어느 한인 독지가의 초대로 흑인학생들에게 플러싱
의 한인식당에서 한국음식을 사주었다고 한다.
그런 조교사가 언제나 하고 싶었던 일은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한국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난 해 이런 사연을 15군데나 보냈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던 중 뉴저지의 한 독지가가 보내온 1,000달러에 자신의 어머니, 언니 등으로부터 얻은 돈을 보태어 학생 2명의 여행경비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학생 2명이 작년 7월 한국에 가서 22일간 체류하면서 한국을 체험했는데 숙식은 친지가 소개한 가정의 민박으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올해는 LA에 있는 한국어진흥재단이 전국에서 35명을 한국에 보내는데 조교사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 2명을 끼워주기로 했다는 것. 그래도 부족한 경비가 있기 때문에 조교사는 모자라는 경비 마련을 위해 캔디를 팔러 나섰다고 한다.
그가 가르치는 한국어반에는 12명 정도의 학생이 나오고 있다. 이제는 한글을 어느 정도 깨우쳐 쉬운 말은 쓰고 읽을 줄 안다. 한국어로 된 신문도 떠듬떠듬 읽어 내려간다고 한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던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 학교의 등교시간은 오전
8시인데 많은 학생들은 제시간에 등교하지 못하고 지각하기 일쑤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어반은 이보다 한시간이 이른 오전 7시에 시작하니 한국어반 학생이 학교시간에 지각할 수는 없다. 조교사는 그것만으로도 대견스럽다고 했다. 그는 이 학생들에게 한복을 입혀 브롱스노인회와 뉴욕한국학교를 방문해 한국문화를 익히게 하고 있다. 또 스스로 진도아리랑을 배워 요즘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이민을 온 조교사가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게 된 것은 지금까지 혼자서 한국어를 써 왔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부터 일기를 썼는데 미국에 와서도 지금까지 계속 일기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모든 글은 영어로 쓰면서 일기만은 한국
어로 썼다고 한다. 워낙 한국에 가고 싶어서 어릴 때는 혼자 도서관에 가서 영어로 된 책에서 한국그림을 찾아보기도 했다고 한다.이리하여 그는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조교사는 한인 1.5세와 2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 교육은 외국인을 상대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또 많은 사람에게 한국을 보여주기에는 자신의 힘이 너무도 미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한국어 교육에 힘써 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한국어 불모지인 브롱스의 한 흑인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문화를 심는데 정열을 바치고 있는 그는 어둠을 밝히고 있는 한 작은 등불인지도 모른다. 이런 등불이 수없이 많이 모이면 이 세상을 밝히게 되지 않을까. 조교사는 이런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차 있었다.
이기영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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