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영 <논설위원>
재미한국부인회 및 예지원의 고문이자 명예회장인 이강혜(82.
베이사이드 거주) 회장은 한인여성의 대모 격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만큼 그는 한인가정과 여성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다. 그는 지난 85년 여성들의 권익신장과 어려운 한인을 돕기 위해 부인회를 설립한 후 어떻게든 한인사회가 밝아질 수 있도록 동분서주했다. 그러
다보니 어느덧 8순이 넘었다. 얼마 전 은퇴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너무나 건강해 젊은 사람 못지않게 정력을 과시하며 한인여성을 위한 일들을 쉬지 않고 벌여왔다. 그 결과 올해 뉴욕한인회가 제정한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71년 4자녀를 이끌고 남편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갔다 9년 후 다시 뉴욕으로 재 이민을 온 이 회장은 이미 한국에서도 봉사 단체를 많이 오가며 활동한 바 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워싱턴 부인회에서 뉴욕부인회를 인준, 부인회 활동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당시는 여성에 관한 활동을 하던 사람이 전무할 때였다. 작고한 염진호 여사가 여성회를 하다가 돈이 없어 집만 두 채 팔아 없애고 이 회장이 하려는 일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그걸 하느냐, 하지 말아라. 힘들고 남한테 욕먹고 길을 지나가는데도 전에 있던 회원들이 인사도 한 마디 안하고 가더라”며 “그런 것을 네가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하지 마라”고 충고하더
라는 것이다. 그래도 이 회장은 개설을 권유해온 워싱턴 부인회의 요청을 이기지 못해 수락, 앞
만 보고 걸어오다 보니 어느덧 3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부인회를 내 가정 지켜오듯 열심히 지켜온 것이다. 젊은이들도 하기 힘든 일을 오로지 의지와
집념, 해야 한다는 생각하나만 가지고 지금까지 한인 사회와 가정, 그리고 여성과 노인들을 위
해 꿋꿋이 일해 왔다. 나이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없어 은퇴를 결심할 때도 부인회가 유명무실
해질 까봐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오랫동안 기다림 끝에 부인회를 이끌고 갈 새 회장은 찾았지
만 그는 지금도 놓여 있는 운영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힘을 보태기 위해 지금도 자문
을 하고 있다. 은퇴 후에도 자식을 늘 걱정하며 잘 되기를 바라는 한국의 어머니처럼 그는 부
인회가 잘되기를 늘 희망하며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 와서 영어소통도 잘 안 되는 상태
에서 용기가 없는데다 아이들 교육도 있고, 또 그 당시 남편이 중풍을 앓고 있는 터라 부인회
를 맡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나 남편의 허락으로 처음에는 플러싱 메플 애비뉴
에 방을 얻어 사무실을 개설했다. 그러나 사무원도 없고, 임원도 몇 명 안 되었지만 그 가운데
서도 그는 한인사회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생활이 어려워 철로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하는 한인을 데려와 뒷바라지를 했는가하면, 유학생
들이 찾아오면 먹을 것을 주고 뒤도 많이 보아주었다. 가출한 입양아들도 따뜻하게 보살폈다.
또 외국에 와 아무 것도 모르는 노인들이 집안에서 자식들한테 대접 못 받고 부인회를 찾아오
면 그런 사람들을 집안 일 또는 아이 봐주며 거처할만한 집을 소개해주었다. 그걸 위해 일일이
집에 데려다 주고 그 후에도 자주 전화해 안부를 물으며 안정 시켜주는 등 실제로 누구도 하기
힘든 궂은 일들을 기꺼이 맡아 처리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늦은 저녁 시각 홀로 사무실에
있는 날이 많아 누군가 이를 보고 혼자 이렇게 하면 어떡하겠는가 걱정하는 말도 자주 듣곤 했
다고 한다. 그러나 운영난으로 쫓겨나 갈 데가 없어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집만 있으면 나라에
서 봉사단체는 다 지원해준다는 말을 해 키세나 블러바드에 부인회로 쓸 집을 장만했다. 그러
나 말처럼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이 회장은 사비로 아래 위층, 3층을 수리, 부인회 사무실과 예
지원을 마련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를 꾸려가기 위해 그동안 그는 사재도 많이 썼다. 돈이 없을 때는 직원 없이 혼자 봉사하면
서 그러나 부인회 맥은 억척스레 이어왔다. 한인사회에서 전폭적인 지원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많은 뜻있는 분들이 같이 호응해주어서 어려운 가운데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해 우미회를 조직, 이들 회원이 행사 때 다들 참여해주고 나와서
도와주고 하다 보니 점점 형편이 나아졌다.
그 결과 뒷 정원을 이용해 훌륭한 어머니상 시상식, 경로잔치, 국제 바자회를 비롯, 노인들과
입양아를 위한 안나 애릭카 양로원 방문, 그리고 입양아 돕기 행사 등을 마련했다. 이중 국제경
로잔치를 할 때는 뒷 정원에서 모든 동네 미국노인들을 초청, 갈비를 구워 대접하고 국악공연
을 통해 미국인에게 한국문화 알리기, 초대한 동네 양로원 노인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친
선을 다졌다. 이 회장의 활동중 특기할 사항은 예지원을 개설, 한국예절 전수를 위해 노력했다
는 점이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에 가서 3개월간 공부하고 난 후 자격증을 취득하고 와서 예지
원을 열어 당시만 해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한국 전통문화인 다도, 혼례, 폐백 등을 가르쳤
다. 그 결과 예식만 하던 결혼에 폐백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대로 거행되기 시
작했다. 또 외국인과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전통혼례, 결혼식을 안 하고 살던 젊은 남녀에게 무
료결혼식을 거행해 주기도 했다. 해산을 앞둔 어려운 형편의 미혼모를 위해 의사 소개 및 거처
할 방도 얻어주고 부인회를 찾아와 도움을 호소하면 임원들과 함께 호주머니를 털거나 사비를
만들어서라도 방을 얻어주는 등 알게 모르게 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계속 경
영난에 부딪치면서 부인회는 노던 159가로 사무실을 옮겼으나 비싼 렌트 비를 감당하기가 어
려워 그는 은퇴 때까지 쓰던 베이사이드에 매입한 개인 집에서 계속 부인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부군이 작고한 후 ‘현혜장학재단’을 설립, 지금까지 7년째 매년 1,000달러씩 형편
이
어려운 가운데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는 아직도 건강에 특별한 문제없이 소녀같이 곱고 화사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리 보아
도 8순이 넘은 나이로 보기엔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그는 단지 걷기에만 조금 불편할 뿐, 지금
도 돋보기가 필요 없고 치아도 모두 건강하며 청력도 아주 좋은 편이다. 그것은 그에게 특별한
비결이 있다. 머리 속에 항상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마음을 비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늘 편안한 마음으로 구김살 없이 밝게 지내는 것이 그의 신조인 것이다. 음식은 저녁엔 과일과
우유 한잔으로 끝내는 소식형. 지난 99년 작고한 부군 김현백씨와의 사이에 자녀 3남1녀가 있
다. 이들은 모두가 훌륭하게 자라 출가해서 집집마다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큰 아들 건배
(54)씨는 현재 수퍼마켓, 둘째 아들 윤배(50)씨는 전기 재료회사를 각각 운영하고 있으며, 셋
째아들 승배(49)씨는 한국에서 미국회사에 다니고 있고 막내딸 은희(46)씨는 캐나다에서 변호
사로 활동 중이다. 자녀에 대한 교육은 늘 좋은 말로 아버지가 했다는데 ‘항상 올바르고 바른
마음을 가지라, 마음을 속이면 괴로움이 오므로 항상 밝은 마음으로 깨끗하게 살고 남을 원망
하지 말며 미워하지 말며 웃어른과 아랫사람에게 할 도리를 다하라는 것’이 가훈이라고 한다.
이제 이 회장은 비록 은퇴했지만 그가 한인사회를 위해 걸어온 발자취와 현혜 장학재단은 계속
남아서 한인사회 빛으로 발할 것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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