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토론회에 나온 존 맥케인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앨런 그린스팬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을 재지명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재지명은 물론이고 만약 그가 죽는다면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산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를 일으켜 세운 뒤 검은 안경을 씌워 놓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인들의 그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은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자리에 앉아 경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가 항상 미국 사회의 정점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과 폴란드 계 유대인을 부모로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비즈니스가 문을 닫자 부모는 이혼하고 그는 단칸방에서 어머니, 외조부모와 함께 자랐다.
그의 학창시절 꿈은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음악가가 되기 위해 줄리어드음대에 다니며 악기를 배우고 재즈 밴드에 가입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나중에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꾼 다음에도 연주는 그의 중요한 취미 생활로 남았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타운센드&그린스팬이란 컨설팅 회사에 다녔지만 그는 30대까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회의론자였다. 그를 열렬한 자유 시장 신봉자로 만든 것은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아인 랜드다. 친구 소개로 랜드 서클에 가입한 그는 시종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어 ‘관 나르는 사람’(undertaker)이란 별명을 얻었으나곧 능력을 인정받아 핵심 멤버로 자리잡게 된다.
그가 여기서 배운 것의 하나가 중앙 은행 무용론이었다. 모든 것을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지 중앙 정부가 개입해서는 역효과만 부른다는 주장에 그는 동감했다. 그와 랜드 등이 함께 쓴 ‘자본주의: 알려지지 않은 이상’이란 책을 보면 대공황과 인플레는 모두 중앙 은행이 시장에 개입하는 바람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금본위제를 선택해 통화를 안정시키는 것이 최선책인 것으로 돼 있다. 한 때 색소폰을 불며 중앙 은행 무용론을 주장하던 그가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중앙 은행장”이란 평가를 받고 있으니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부시 대통령이 24일 그의 후임으로 벤 버낸키 대통령 경제자문위 의장을 지명함으로써 장장 18년에 걸쳤던 ‘그린스팬 시대’는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물러가지만 그의 ‘유령’은 계속 남아 FRB를 지배하리라는 관측이 높다. 부시가 버낸키를 선택한 것은 그가 그린스팬의 생각을 가장 잘 대변한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시로서는 마이어스 대법관 지명에 따른 논란의 재발을 피하고 하루 속히 시장을 안심시키려면 제2의 그린스팬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 실제로 그가 FRB 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린스팬이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간단 명료한 버낸키의 말을 듣고 그린스팬의 의중을 헤아리기도 했다.
버낸키의 지명 소식에 대한 워싱턴 정가와 금융 시장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하버드 최우등 졸업, MIT 경제학 박사, 프린스턴 경제학과장 등 학벌로 봐도 흠잡을 데가 없고 이미 FRB 이사 지명 때 두 차례, 대통령 자문위 의장 지명 때 한 차례 등 3번이나 상원 인준을 거친 인물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통과에 지장이 없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의 지명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우존스 종합 주가 지수는 수개월 내 최대 폭인 180 포인트나 뛰어 투자가들을 즐겁게 해줬다.
지난 20여 년 동안 폴 볼커와 그린스팬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중앙 은행장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들의 행운이다. 그 덕에 미국 경제는 70년대 두 자리 인플레, 87년 주가 폭락, 97년 IMF 사태, 9/11 사태 같은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버낸키가 부시 말대로 미국의 “전설”인 그린스팬이 떠난 자리를 잘 메울 수 있을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