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파산을 뜻하는 ‘뱅크럽시’(bankruptcy)는 라틴어로 테이블을 뜻하는 ‘bancus’와 부서졌다를 뜻하는 ‘ruptus’가 합쳐진 말이다. 중세 말기 이탈리아에서는 금융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장터에서 책상을 놓고 업무를 봤다. 그러다 장사가 안 돼 폐업을 하게 되면 테이블을 부숨으로써 문을 닫았음을 알렸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해 빚을 지게 되면 책상하나 부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까지 유럽 각국은 고의든 과실이든 이유를 불문하고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을 형사범으로 취급해 감옥에 집어 넣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함께 갇히는 일도 많았다.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가 여러 소설에서 서민층의 애환을 절실히 그려낸 것도 본인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채무자 감옥’에 수감된 경험이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고의적으로 돈을 떼어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장사가 안돼 어쩔 수 없이 빚을 못 갚게 된 사람까지 감옥에 넣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이 제도는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파산자의 부채를 탕감해 줘 새 출발을 하게 해주는 것이 일반적 추세로 자리잡았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도 최근까지 파산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보여왔다. 챕터 7을 신청해 받아 들여지면 크레딧 카드와 의료비를 비롯 대부분의 개인 부채는 탕감됐다. 파산 기록은 10년간 남아 융자를 받는데 지장을 줬지만 한번 사업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재기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컸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개인 파산을 어렵게 하는 새 파산법이 17일부터 발효했기 때문이다. 새 법은 대부분의 경우 챕터 7 파산을 어렵게 하고 그대신 5년간 진 빚을 나눠 갚아야 하는 챕터 13 파산 신청을 하도록 하고 있다. 그 주 중간 소득 이상을 버는 사람은 앞으로 챕터 7 대신 13을 신청해야 하며 파산 신청 수수료도 올라가고 신청자는 크레딧 카운슬링과 채무 교육도 받아야 한다.
지난 한달간 미 전역 파산 법원은 새법 발효전 파산을 신청하려는 사람들로 문전 성시를 이뤘다. 하루 3만 건정도이던 신청자 수가 6만을 넘어섰으며 LA의 경우 야외에 텐트를 치고 신청을 받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올 파산 신청자 수가 전년에 비해 20% 정도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연방 정부가 1978년 이후 처음 대대적으로 파산법을 개정하게 된 것은크레딧 카드 회사들의 로비가 주효했다. 10년마다 크레딧 카드 빚을 잔뜩 진 후 파산 신청을 하고 떼어먹는 얌체족들의 법 악용을 막아야 한다고 수년 째 부르짖어 온 것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이다.
그러나 리버럴 진영에서는 이 법은 대기업과 채권자의 이익만 생각하고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악법이란 목소리가 높다. 챕터 7을 부르는 사람들의 절반이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서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사업 실패로 인한 것인데 이들에게 빚을 모두 갚으라고 한다는 것은 실패해도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는 미국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법 찬성자들은 현행법처럼 채무를 너무 쉽게 탕감해주는 것은 성실하게 꾼 돈을 갚아나가는 대다수 소비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빚을 얻어 재산을 빼돌리고는 만세를 부른 후 호화롭게 생활하는 사기 파산자를 양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추리 소설에서 범인을 잡을 때 자주 나오는 속담에 “돈을 따라 가라”(Follow the money)라는 것이 있다. 백마디 말보다 돈의 행방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어느쪽 주장이 옳던 간에 거듭된 감세 조치와 함께 이번 파산법의 시행은 부시 행정부의 지지층과 정치 철학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 경 훈 논설위원
kyum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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