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프린스턴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은 지금도 명문이지만 미국이 건국될 무렵에는 미국 내 어느 대학보다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1787년 연방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구성된 제헌 의회 대의원 중 대학 졸업자는 25명이었는데 그 중 9명이 프린스턴 출신이었다. 하버드는 4명, 예일은 그보다도 적었다.
프린스턴이 미국 지도자 양성소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존 위더스푼이란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다. 그곳에서도 명망 있는 종교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던 그는 프린스턴 총장으로 와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하나님의 큰 뜻을 펴기 위해 대서양을 건넌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개신교 목사였음에도 계몽 철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철학, 과학, 역사, 문학 등 당시로서는 모든 첨단 학문을 가르쳤으며 자기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상가도 차별 없이 배우게 했다. 수백년 간 유럽을 뒤흔든 종교 전쟁과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학살극이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상당 부분 ‘사상의 자유’와 관용 정신을 가르친 위더스푼의 공이다.
여러 철학자 가운데서도 그가 집중적으로 교육한 것은 데이빗 흄, 애덤 스미스, 토마스 리드와 같은 스코틀랜드 계몽 철학자들이다. 뒤에 흄의 회의론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관은 정치 종교적 포용의 정신을, 스미스의 ‘국부론’은 미 산업 혁명 개화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리드의 상식주의는 현학주의를 떠나 실용과 현실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더스푼의 이런 생각은 나중에 그의 수제자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 현실화된다. 제정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의 최고 법으로 남아 있는 연방 헌법을 초안한 매디슨은 위더스푼을 돕기 위해 프린스턴 졸업을 늦췄을 정도로 그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헌법을 만들면서 가장 고심한 문제의 하나는 어떻게 천성적으로 타락하기 쉬운 인간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는 그 해답을 권력의 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에서 찾았다.
미 헌법에 명시된 입법, 행정, 사법부 가운데 특이한 것은 사법부의 기능이다. 국민이 뽑지도 않은 법관이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회와 대통령이 만든 법률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얼핏 비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식이 있는 9명의 국민이 내린 판단은 집권자의 의지인 법보다 존중돼야 한다”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연방 헌법과 함께 미국을 떠받치는 기둥인 ‘독립 선언서’를 초안한 토마스 제퍼슨 역시 “진리의 자명함“을 주장한 토마스 리드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미국인들이 독립을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독립 전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토마스 페인의 팜플렛 이름이 ‘상식’(Common Sense)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스코틀랜드 상식주의가 미 건국에 얼마나 깊은 뿌리를 내렸는가 알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3일 퇴임하는 샌드라 데이 오코너 후임으로 자신의 개인 변호사이자 백악관 법률 고문인 해리엇 마이어스를 지명했다. 부시에 대한 충성도가 뛰어나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의외의 인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일부에서는 골수 보수파가 임명되지 않았다고 불만인 모양이지만 부시의 정치 성향을 보면 그와 생각이 다른 인물을 앞으로 수 십 년간 대법원의 향방을 좌우할 자리에 앉혔을 리 없다.
“자유와 평등, 행복 추구 등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창설되었다”는 것이 미국의 건국이념이다. 그러나 미국의 창업자들은 이에 못지않게 상식이 통하는 사회, 이성과 관용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썼다. 새로 연방 대법관에 지명된 마이어스가 “미 창업자의 비전에 충실하겠다”고 한 말이 눈길을 끈다. 과연 그녀가 대법관이 된 뒤 어떤 판결을 내릴 지 궁금하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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