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반대 1만명 서명운동 산호세에서 시작, LA, 시애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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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여명 서명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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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서 지난 7월 불거진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이 북가주를 포함한 미주 한인사회에까지 번지고 있다.
해외동포 9.28협회(회장 택 장, 부회장 김완식, 준비위원장 최병선, 고문 이하전)는 지난 7월 17일(일) 인천 자유공원내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에 대해 북가주 한인 1만명 서명운동을 통해 동상 철거 반대에 대한 강력한 입장을 본국 정부에 전달하기로 했다.
북가주 광복회(회장 이하전), 북가주 6.25참전국가유공자회(회장 함형국), 북가주 해병전우회(회장 이태희)가 주축이 되어 맥아더 동상 철거 반대 운동을 벌이기 위해 설립된 해외동포 9.28협회는 지난 7월 23일(토) 1차 모임 이후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서명운동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 반대’라고 적힌 어깨띠를 제작, 북가주 지역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홍보전을 통해 서명운동을 통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이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를 반대하는 이유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은 ①대한민국의 6.25 전쟁 승리의 상징 ②유엔의 세계 평화와 자유수호의지의 상징 ③자유의 가치를 가르치는 역사적 기념물 ④세계전쟁사의기록물이며 ⑤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운동을 주장하는 단체는 국민을 오도하고 있다.
현재 북가주 지역에서는 실리콘밸리 한미상공회의소(회장 알렉스 허), 북가주 R.O.T.C 협회(회장 최문규), 북가주 해군 해병대 군목회(회장 김택규), 북가주 재향군인회 실리콘밸리 지회(지회장 박노경), 상항 한미노인회(회장 최봉준), 상항 6.25전우 친목회(회장 이길하) 등 단체도 이를 후원하고 있다.
이제까지 철거 반대 운동에 서명한 사람은 약 4천여 명이며 LA, 시애틀 등 다른 지역에까지 이 운동이 번지고 있다.
이 협회측은 LA에 거주하는 김종하씨가 서명운동에 써달라며 3천달러를 보내왔으며 워싱턴 주 신호범 상원의원도 택 장 준비위원장에 동참을 표했다고 밝혔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택 장 위원장은 “지역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명용지를 받아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북가주 뿐만 아니라 미주 곳곳에 동상 철거 반대 운동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또 그는 “미주 1만 한인의 서명운동의 결과물을 청와대에 전달할 것”이라며 “자유 및 세계 평화의 상징인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쪽에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는 청와대가 이를 보고 정신을 차리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인뿐만 아니라, 산타클라라 카운티 피트 맥휴 수퍼바이저 및 산호세 척 리드 시의원 등 미주류계 지한파 인사들도 서명에 동참한다고 협회측은 밝혔다.
이들은 오는 13일(토) 샌프란시스코, 20일(토) 오클랜드에서 모임을 갖는다.
<유호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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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동상 철거를 원하는가?
‘자유의 상징’으로 불려온 맥아더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화된 것은 2002년 6월 의정부에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2명이 압사한 뒤 가해 미군에 대해 무죄 평결이 난 이후다.
이후 2002년 12월 5일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회원 30여명이 맥아더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동상 위로 오르려다 경찰에 의해 제지된 바 있다. 올해 들어서는 우리민족연방제 통일추진회의(의장 김수남, 이하 연방통추)가 지난 5월 10일 첫 농성에 들어간 뒤 인천시청과 중구청 등지를 돌며 두 달여간 농성을 벌여왔었다.
이 논란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7월 17일(일)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동상철거를 요구하는 연방통추 소속 약 1백여명과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인천지구 황해도민회(회장 류청영)외 1천여명이 동상앞 광장에서 팽팽히 대치하면서부터이다.
이 날 연방통추 김수남 의장은 “맥아더 장군은 조선의 분단을 부추긴 점령군에 불과할 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볼 수 없다”며 동상 철거를 주장했다.
이에 황해도민회 류청영 회장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조국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라며 “한국을 구출한 은인을 이런 식으로 평가한다면 국제사회에서 비열한 민족으로 매도될 것”이라고 맞섰다.
연방통추는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9월15일을 전후해 또다시 대규모로 동상 철거 촉구 집회를 개최한다는 방침이어서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대결 양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일(화) 노동신문의 논평을 보도하며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민족의 수치’로 규정하고 “당장 폭파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증오와 폭파의 대상’이라는 개인필명의 이 논평은 “맥아더는 전쟁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 최악의 살육과 파괴 작전을 감행, 삼천리 조국강토를 겨레의 피로 물들이고 폐허로 만든 극악한 살인자”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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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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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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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군인 A. 맥아더의 아들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1880년 1월 26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7년 잔 페어클로스와 재혼했으며 아서라는 아들이 있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졸업한 후 임관했다. 1917년 제 42단의 참모진에 배속됐으며 1920년에는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했다. 1925년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28년에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됐으며 1937년 퇴역했다. 그러나 그는 1941년 현역으로 복귀해 미국 극동군 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했으며 1942년 호주에서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 대일작전을 지휘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되고 난 후 국제연합군(UN) 최고 사령관으로 부임해 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했으며 1952년 레밍턴랜드사 이사장을 역임하고 1964년 4월 5일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었으나 1951년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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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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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이다.
전쟁이 일어난 후 김일성을 우두머리로 한 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에 연합군은 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고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했다.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리즈는 이를 가리켜 20세기의 칸네 전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칸네 전투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중인 기원전 216년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칸네에서 로마군을 섬멸시킨 전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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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VS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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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Operation Overlord’라고도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 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 6월 6일 개시한 연합군의 북유럽상륙작전이다.
당시 전세가 연합군쪽으로 기울자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육해공군 합동의 상륙작전을 단행한다. 이는 프랑스 북부해안인 노르망디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나치 독일의 심장부를 궤멸시킨다는 계산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D-데이’인 6월 6일 연합군은 함선 1천 2백여척, 항공기 1만여 대, 상륙주정(舟艇) 4천 1백 26척, 수송선 804척 그리고 수백대의 수륙양용 특수장갑차로 편성된 대부대를 노르망디에 상륙시켰다. 당시 이 작전에 투입된 인력은 15만 6천여 명으로 이 가운데 13만 2천 5백여 명이 배로 영국 해협을 건넜고 2만 3천 5백여 명은 공중으로 수송됐다. 당시 영국 해협의 날씨가 25년만에 최악의 상태였으므로 작전이 24시간 연기된 후인 6월 6일 동트기 전 영국의 기습부대가 주요 교량을 점거하고 나치의 통신망을 두절시키는 동안 미국 제 82, 101공수여단이 생매르에글리즈 시 근처에 야간상륙하면서 공격이 시작됐다. 이 작전을 계기로 독일은 전세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됐고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파죽지세로 진격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참조: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상륙작전 그 이후
상륙지였던 노르망디 지방의 오마하 비치의 172에이커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9천 387명의 전몰용사 묘비가 세워졌다. 프랑스 정부가 오마하 비치 묘소의 국토를 미국에 기부하여 유럽내 유일한 미국의 영토가 됐다.
▷인천상륙작전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로 불렸던 인천상륙작전은 지리적 여건상 간만의 차가 크고 항구에 이르는 수로가 협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작전을 감행, 성공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당시 미국은 상륙지로 군산을 제안하기도 했었으며 인천에서의 성공확률을 5천분의 1로 보았으나 맥아더 장군은 그 확률을 역이용, 적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했다. 작전 성공후 연합군은 38선을 돌파, 한국전쟁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당시 상륙군은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한국과 미국의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해 작전 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제 2단계로 한국해병과 미해병 및 육군이 인민군을 공격,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 및 수원을 확보했다.
제 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와 미 해병 1사단이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해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넜으며 한국 해병대가 26일 서울시청, 27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28일 역사적인 서울 수복식을 거행했다.
상륙군은 미 10군단으로 미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으로 편성됐다. 7월 25일 동원령에 의해 재편성된 미 해병1사단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돼 있던 5연대를 중심으로 유럽주둔부대와 예비역 가운데 1연대와 7연대를 조직하도록 되어 있으나 7연대의 인천도착이 9월 25일로 늦어짐에 따라 한국 해병대 1연대가 대신 작전을 수행하게 됐다. 또한 미 육군 7사단 역시 병력부족으로 한국 육군 17연대를 작전에 투입함으로 한국군 역시 인천상륙작전에 동참했다.
▲상륙작전 그 이후
한국정부는 6.25전쟁 중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을 기리기 위해 1957년 9월 15일 인천 자유공원 정상에 오른손에 망원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높이 5미터)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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