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2월, NBC는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3년 간 재탕하고 20세기 폭스와 다시 22년 동안 20회를 상영하는 권리금으로 그때 돈 2백 15만 달러를 지불했다.
나는 그 영화를 이십대 초반에, 그리고 30대 후반, 다시 50대 초반에 본 세 번의 느낌을 모아 글로 남긴 적이 있다. 어쩌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NBC TV회사가 재탕료를 내고 보여준 그 영화 인가보다. 볼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내가 처해있는 환경과 입장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감회도 달랐다.
나는 학군단 경리장교로 복무할 때 소위 봉급의 40배가되는 돈을 잃어 버렸다. 담당 병사가 오백 원 뭉치를 백 원 뭉치로 잘못 담아 지급한 거였다. 사흘동안 물 한 모금을 넘기질 못했다.
서울로 돈을 마련하러 나왔는데 부대에서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다음날 아침, 구름 위를 걷듯 시내에 나왔다가 본 영화였다. 마치 바싹 마른 논에 물이 차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캡틴 본.트랩이 에들바이스를 부르다가 울먹이자 마리아가 다가가 감싸며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였다. 나는 봇물 터진 듯 흐르는 눈물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이민생활이 전쟁이라고 여겨지던 시절 늦은 밤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무심코 TV에서 만난 영화였다. 그 밤에 엄청 술을 마신 생각이 난다. 그리고 삶의 행로가 어느덧 반환 지점을 훨씬 넘어서서 마음속의 것을 잃어 간다고 느끼던 나이에 세 번 째 본 영화도 그랬다. 한 영화가 그때마다 그렇게 큰 위안을 주는 줄은 몰랐다.
매일 신문지상에서 만나는 조화유씨를 아주 오래 전에 만났을 때 물어보았다. "이놈의 영어 어떻게 해야 정복 할 수 있나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말했다. "영화를 계속 보세요" 하기야 요즈음은 TV에서 한국의 신세대 말도 빨라서 못 알아듣는 처지이니 미국에 살다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꼴이 되겠다 싶어 어제는 아들이 이사가면서 버리고 간 <사운드 오브 뮤직> 비디오 테이프를 순전히 그런 마음으로 다시 보았다.
4탕(四湯)인 셈이다. 처음에는 다른 책을 보면서 영화 속의 음악을 듣고 대사가 나오면 TV를 들여다보는 무성의한 감상이라 그런지 별로였다. 우선 그동안 스위스를 중학 친구들과 수학여행 하듯 다녀온 경험 탓인지 배경의 신선도는 확실히 전만 못했다. 미국의 엄청 큰집들을 보아온 내 눈으로는 켑틴 본.트랩의 저택이 쥬리 앤드류(마리아)가 놀라는 만큼 커 보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다음 장면을 알기 때문인지 박진감은 제로였다. 아마도 안달을 하면서 알고 싶어하는 인생의 한치 앞을 미리 안다면 이처럼 무미건조 할 터이다.
그러나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이 많아지고 영화에 다시 몰입하게 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명화였다. 사건의 전개에 따른 충격요법은 체감되었을망정 편안한 작은 감동들이 꽃잎처럼 행복감을 되살려 내고 있었다.
중년의 안정감처럼 혹은 잘 익은 장맛처럼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저런 말도 했었네, 저런 표정도 있었네, 하다 못해 배경에 보이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흔적이 보이면 그 부족함까지도 이해하고 받아 드리게 되었다.
축구경기를 보러 갔을 때였다. 골대 앞에서 어물어물하는 듯 싶더니 탄성이 일어나고 경기장이 무너지듯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 결정적 골인 장면이 TV에서처럼 재현되지는 않았다. 돈 내고 찾아가서 오랜 시간 기다리다 본 순간치곤 너무 허무했다.
그러니 가슴을 벅차게 해주는 그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음은 재탕의 별미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담겨진 사랑은 언제 보아도 가슴에 차 오른다. 오페라도 그렇고 뮤지컬도 그렇고 복음성가가 그렇다. 사랑이 없는 삶이 주는 피폐함처럼 세상은 확실히 사랑과 불신으로 이분되어 있으며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성취한 사랑은 묘약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은 자기 것으로 욕심내는 만큼 잃어버리고 자기 안에서 귀한 것을 꺼내어 나누는 만큼 얻게된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이어야 사랑의 물이 채워진다는 것도 재탕에서 담아낸 즐거움이며 그런 사랑은 유행이나 시대의 감각과는 전혀 별개의 감동임을 알 것 같다.
현대 젊은이들은 한번 사용하면 서슴없이 버리는 경향이다. 물건뿐이 아니다. 생각도 버리고 느낌도 버린다. 그리고 사랑도 버린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도 소가 묵묵히 반추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할지언정 다시 시도하는 재탕에서의 은근한 맛을 소흘히 하는 것 같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명작처럼.
성직자 한 분이 오랜 단식 후에 멸치 한 마리를 백 번 씹었더니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뒤도 안보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걸까. 음미도 안하고 씹어 넘기려고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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