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쐣, 눈 치우려면 땀께나 흘려야겠네."
경비반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몸집은 풋볼게임의 방어선에 있는 선수보다 더 거창한 체격의 남미 사람이다. 그런 몸집으로 여기서 26년을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가끔 자기가 싫은 일이 생기면 미국에서 가장 고상한 욕은 다 찾아 짓거리는 것 같았다. 병우는 여기서 근무하면서 영어보다 욕을 많이 배웠다고 할까. 병우는 경비일지를 덮었다.
"야, 아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네......"
병우는 눈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이 오는 날이면 아득한 추억이 생각난다. 지리산 칠선 계곡에서 눈 때문에 한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있었던 삼일간. 남자 셋 명 여자 둘이 새해 맞이하러 올라갔던 산정. 내려 올 때 깜짝이 폭설이 내렸다. 텐트 속에서 날씨는 춥고 먹을 것도 다 떨어져 오돌오돌 떨고 앉아있던 그녀. 병우의 시야에서 소영의 얼굴이 눈 속을 헤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병우가 이곳으로 온 지도 일년이 다 되어간다. 병우는 입맛을 두어 번 다셨다. 나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무미건조한 자신이 검은 먹구름 같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있지? 이렇게 살아 보려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을까?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올 때는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자문자답을 할 수밖에 없으니 그게 더 억울했다. 이런 나를 믿고 사는 사람은 오죽할까.
병우는 좁은 땅, 어느 한 곳도 길이 보이지 않고 또 자라는 어린 자식의 앞길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오기를 갈망하는 곳을 찾아왔다.
오는 다음날부터 출근한 곳. 도시의 외곽에 있는 한 건물의 경비원이 되었다. 병우는 이 땅에서 자신의 제 이의 꿈과 삶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병우가 정착한 곳은 세계인들의 호기심으로 가득한 도박과 마약, 섹스의 향연밖에 없는 도시 리노. 병우는 세계인들이 보고싶어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차이나타운 구경도 아직 못했다. 부산서 서울까지 연극도 보러 갔다온 적이 있었다. 그런 거리보다 가까운 곳에도 한번 못 가보고 있다. 그러나 호기심으로 섹스의 유희도 구경했고, 도박도 해봤다. 두 번은 가고 싶지 않는 곳이란 이젠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병우는 수화기를 들었다. 소영은 전화를 받았다.
"당신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은 걸 보니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겠군요. 조금이라도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할 수밖에 없는 이 못난 남편 용서하시오. 사랑하는 부인."
소영은 가슴이 뜨금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 같았다.
"자기가 그걸 어떻게......"
"내가 누군데......"
"내 남편이고, 보라 아빠지."
"눈이 오는 날이면 하늘을 쳐다보고 괜시리 서러워오는 가슴을 울렁이는 여자의 못난 남편이야."
".........."
소영은 할 말이 없었다. 말 그대로 유구무언이었다.
"남들은 모두다 즐거워 하지만 우리 마님에게는 서럽기 짝이 없는 전령사라는 것 왜 모르겠어. 보라 엄마. 오늘 같은 밤 추억 하나쯤 만드는 의미에서 데이트합시다. 지난 토요일 햄버그 사달라는 보라를 모질게 다그치던 당신 목소리 아직도 생생해. 살면서 꿈을 이루어 가야 하는데 자꾸만 꿈을 잃어버리게 하는 남편도 위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요."
"보라 아빠......"
소영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울고 말았다.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듯이 헤아려 주는 부드러운 남편이 곁에 있다. 전기 공학과를 나와서 꿈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했다. 진급도 잘되고 회사도 탄탄하여 한참 잘나갔다. 그러다 운수가 사나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자기가 책임을 지고 회사를 나와야 했다.
그때 그의 가슴이 오죽이나 아팠을까. 죽고 싶다고 하는 그 외로운 독백. 정작 꿈을 잃고 있는 건 자기면서 오히려 나에게 태연하게 웃는 그이. 그러다 언니의 초청으로 미국 들어와 자기의 꿈을 위해 최첨단의 과학기술이 생산되고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이런 소도시에서 경비를 하고 있는 그이. 그러면서도 지금은 형편이 어렵더라도 여유 있게 살아가자. 우린 아직 젊음이 있다. 오늘의 아픔에 내일의 희망을 걸고 그이에게 최대한 아름다운 미소를 전달해주자. 그리고 아름다운 밤의 작은 추억 하나쯤 만들어 보자고 소영은 외출준비를 한다. 신이 난 보라는 빨리 나가자고 보챘다.
병우는 눈길 위에서 보라를 들춰 업었다. 병우는 소영이를 바라보면서 보라에게 묻는다.
"보라야, 맛이 어땠어?"
보라는 엄지손가락을 들면서 만족하게 웃는다. 식곤증이 오는지 금새 눈을 감았다. 소영은 남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어깨에다 머리를 기댔다. 소영의 환한 미소가 병우의 가슴을 푸근하게 해준다. 잔잔하게 아픈 추억이 가슴에 새겨지는 눈물겨운 밤인 것 같았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부부의 마음인 거야. 산다는 것도 이런 거야. 살다 보면 한없이 버림받은 듯한 나 자신도 찬란한 새해의 마음속에 뜨는 태양이 그렇게 서러운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병우는 가슴의 전율을 느끼며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하늘을 보며 더욱 열심히 사는 거야. 이 눈물겨운 밤의 추억을 이정표 삼아. 마누라의 미소처럼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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