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동안 미루어 오고 있다. 나영은 퇴근하면서 민호를 만나러 간다. 서로가 알고 지난 지는 3년이 넘어가고 있다. 나영은 처음부터 결혼이란 조건을 가지고 맞선을 봤다. 민호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 아주 부드럽고 고운 흙으로 잘 빚어 만들어진 한 조각품이었다. 키도 크고 말도 시원스럽게 잘했다. 그래서 나영이 한방에 뿅 갔는지 모른다. 두 남녀가 다 좋다고 했고, 양쪽 부모도 후한 점수를 서로 주었다. 금방 약혼식을 할 것 같았는데 자꾸 미루어져 오고 있다. 서로가 다 같은 1.5세대다. 그런데 나영은 미모에 비해 공기가 좀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민호가 한 여름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나영의 나이가 환갑의 반이 되었다. 이러다 처녀귀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일어나고 있다.
나영은 민호를 만나면 결판을 내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다. 민호와 그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화성에서 온 사람을 찾아갈까. 나영은 민호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 모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오래 전부터 나가는 금요 독서회에서 만난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냥 친구였다. 그래 그런지 가끔 만나지만 특별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만나 이야기하면 편안하고 말하는 것이 구수하고 재미있다는 것 외에 별다른 느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만나 그의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다.
민호는 와 있지 않았다. 나영은 창가에 가 앉았다. 스프링클러에서 시원한 물이 나와 잔디와 그 주위의 꽃들을 촉촉이 적셔주고 있다. 저 식물들이 뜨거운 태양의 열 아래서 얼마나 갈증을 느꼈을까. 내가 결혼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저들도 저 시원한 청량수를 마시기 위해 얼마나 갈망했을까.
"늦어 미안해."
민호가 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밝은 웃음을 짓는다. 저 웃음 뒤엔 무엇이 있을까. 따스한 사랑. 능청스런 심술.
"그래, 어떻게 되었어?"
"뭐가?"
"또 딴 청이야, 너 같은 인간을 믿고 여기까지 온 내가 바보였지."
나영은 옆에 놓아둔 가방을 들고 엉덩이를 들었다. 민호가 재빨리 이쪽으로와 앉으면서 나영을 도로 앉힌다.
"왜 이래 창피하게, 저리가 바로 앉아."
"그래, 내 이야기 듣고 가."
"빨리 저리가."
나영은 민호를 밀어낸다. 좋다고 시시덕거리며 팔짱을 낄 때는 언제고 밀어내기는 왜 밀어낼까. 민호는 자기 자리로 와서 의자에 길게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 나영은 힐끗 쳐다본다. 또 무슨 변명할 시나리오 작성을 하고 있겠구나. 이젠 그 어떤 배역을 하라고 해도 난 안 받아들일 거야. 민호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영은 불안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영은 입을 꽉 다물고 불퉁하게 앉아 커피 잔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우리의 뜻이 이루어졌어."
민호는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나영이 앞으로 내어 민다. 나영은 의아스런 눈빛으로 민호를 쳐다본다. 열어봐 한다. 나영은 긴장된 마음으로 봉투를 집어 내용을 살펴본다. 거기엔 두 사람의 이름과 7월 26일 토요일 오후 7시 포스터 시티 그랜트 호텔이란 글자가 궁서체로 찍혀 있었다. 나영은 다시 확인하면서 천천히 읽고 있다. 이것이 사실일까. 그동안 말로만 준 내용보다 더 확실한 문서 내용이었다.
"우리 약혼, 이것 믿어도 되는 거야?"
"그동안 미안했어, 복잡한 일이 있어서, 그리고 9월 달에 결혼해."
"이것 누구의 결정이야? 네?"
나영은 민호 곁으로가 키스라도 해주고 싶었다. 나영은 결혼한다는 말에 다시 고무풍선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와 베이 물가에서 민호한테 뜨거운 사랑을 전달해주었다.
나영은 내일 약혼 반지를 사러 가자는 민호의 말에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약혼 날짜를 잡고 보니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다. 나영은 서류 결재를 받고 내려오다 계단 끝에서 민호를 만났다. 그의 손에도 결재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민호가 어찌 우리회사 사장한테 결재를 받으러 왔을까. 사내라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참, 이 반지 받아 줘. 너한테 주고 싶어서 지난번 영국 갔을 때 사왔어."
"아니, 이런 것을......"
나영은 수줍은 듯 손을 내어 밀었다. 민호는 손바닥 위에 올려주고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른다. 나영은 황홀감에서 올라가는 민호를 힐끗 쳐다본다. 나영은 반지 박스 뚜껑을 조심스럽게 연다. 이 반지를 약혼반지로 주는 것일까. 순간 나영은 눈이 둥그러지면서 입이 하마 입같이 쫙 벌어진다. 들고 있던 서류철이 떨어졌다. 반지 통 안에 꽂혀 있어야 할 반지는 없었다. 빈 반지 통. 찌르릉 찌르릉 전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나영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왜 이런 일이 꿈에 나타났지.’ 불긴 한 생각이 든다.
"나 민호야, 내 말 잘 들어줘. 우리 약혼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해. 미안해."
나영은 들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뜨리면서 눈앞에 빈 반지 통이 클로즈업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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