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지러움에 맞서 영원한 자유를 노래한 시인. 그리고 평생 가난이 직업이었던 시인 천상병.
천상병 시인은 전기고문에 따른 후유증으로 아이도 못 낳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그의 손발이 되어준 예쁜 아내 목순옥 여사가 곁에 있었고 주변에 그를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죽어서도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리는 등 ‘복 많은’ 사람이라는 말도 듣는다. 올해 그의 10주기 추모 행사가 미국과 캐나다 등 해외에서도 열린다.
미동부한국문인협회(회장 이정강) 주최, 뉴욕한국일보 특별 후원으로 20일 오후 7시 플러싱 금강산 연회장에서 열리는 ‘천상병 시인 10주기 추모 행사’에 미망인 목순옥씨와 그의 시 ‘귀천’을 노래한 가수 이동원씨가 참석, 이야기와 노래로 그의 삶을 들려준다. <편집자주>
■ 18세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한 천재시인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난 천상병은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마산중 5학년 때 무덤가에서 우는 사람들을 보고 열 여덟 살의 소년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한편의 시 ‘강물’을 쓰게 된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이 시는 담임 교사였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유치환 시인이 추천, 1949년 월간 잡지 ‘문예’지에 발표됐다. 1950년 미군 통역관으로 근무할 당시 6.25 전쟁으로 무수히 죽어간 사람들을 지켜본 김남조 시인의 시 ‘목숨’을 접하며 문학가로서 새로운 인생에 눈뜨게 된다.
서울대상대에 입학 후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며 문학활동을 했고 1954년 서울상대 권오복 학장이 성적 5위안에 드는 학생은 한국은행에 그냥 들어갈 수 있다고 권고했으나 평탄한 생활이 보장된 길을 버리고 나머지 한 학기를 포기한 채 가난한 시인의 삶을 선택한다.
■ 인생을 바꿔 놓은 전기고문
천상병은 소설가 한무숙씨와 극작가 신봉승씨 등 문인들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천하의 식객이면서도 언제나 짓궂고도 당당했다.
시인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이 쓴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에도 소개되었듯이 그의 장난기는 못 말릴 정도였다. 대학시절 한무숙씨 집에 얹혀 살던 당시 한씨 부부가 잠든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 양주병인줄 알고 한씨가 애지중지하던 향수를 병째 단숨에 들이킨 사건에서부터 비단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리기도 했다.
선물로 들어온 맥주 상자에서 한 병씩 뽑아내어 몰래 마시고는 빈 병들에 물을 채워놓는 등 별별 개구장이 짓을 다했다.그래도 천시인이 워낙 선량하고 천진난만해 전혀 미움을 받지 않았고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이처럼 법 없이도 살던 그가 어느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동백림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1967년 대규모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죄목은 불고지 죄였다. 동백림 사건의 핵심 인물인 친구가 간첩인 것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고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는 억울한 죄목으로 세 번이나 전기고문을 당했다. 옥살이에서 풀려났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마침내 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행려병자로 취급, 병원에 실려갔다. 소식 없는 그가 죽은 줄로만 안 친지들에 의해 유고시집 ‘새’가 발간돼 살아 있는 시인이면서 유고시집을 발간한 일화를 남겼다. 이 일로 마흔 세살의 늦총각은 친구의 누이동생 목순옥씨와 결혼하게 된다.
■ 가난해도 부자였던 행복한 시인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시 ‘행복’에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은 불편하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안정을 되찾아 행복에 잠긴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또 ‘나의 가난은’이란 시에는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란 귀절이 있다. 가난하지만 누구보다도 떳떳하고 마음이 부자였던 시인이었다.
하루 맥주 한병이면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천시인은 평소 아이를 너무 좋아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친구로 삼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자 ‘전기고문 두번만 받았어도 아이는 낳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을 정도였다.시집 <요놈 요놈 요이쁜놈>중 시 ‘요놈 요놈 요놈아!’를 보면 얼마나 아이를 좋아하는 지를 엿볼 수 있다.
■ 순진을 팔아먹은 도적놈 천상병
조병화 시인은 천상병 시인과 걸레 중광스님, 작가 이외수씨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이 세상 가장 솔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사회적인 통념이나 윤리라는 ‘벽’에 의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 속에서 이들이 기인(奇人)으로 불리며 유명해진 것도 자신의 영역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천시인은 아이처럼 순진한 사람이었다. 천진함에 부인은 그를 일 곱 살배기 아이라고 했다.그가 그토록 순수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이처럼 순수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천상병, 중광 스님, 이외수씨의 시를 모아 놓은 ‘도적놈 셋이서’에서 천상병은 ‘천진’을 잘 팔아먹은 놈으로 묘사돼 있다.
<김진혜 기자> jhkim@koreatimes.com
■ 천상병 시인 약력
1930년 일본 히메이지(姬路)시에서 출생
1949년 마산중학 5년 당시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유치환 시인에 의해 잡지 <문예>에 추천. 1950년 미국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1951년 전시 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 입학, 동인지 <처녀>를 발간. 1952년 <갈매기>가 <문예>에 추천(추천 시인 모윤숙). 1954년 서울상과대학 수료. 1956년 <현대문학>에 월평 집필.
1979년 시집 <주막에서> 출간. 1984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출간. 1985년 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 출간. 1987년 시집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1989년 시집 <귀천> 발간 1990년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출간.
1991년 시선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간행.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출간.1993년 4월28일 숙환으로 별세,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출간.1995년 시집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출간. 1996년 영역 시선집 <귀천> 출간.2001년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출간. 2003년 新 도적놈 셋이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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