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언주의 세상보기
▶ 적극적인 참여로 바른 토양 조성해야
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신앙이라는 용어는 주로 하나님의 존재, 목적, 말씀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신뢰는 내제된 것이기는 하나 비록 하나님이 성취하신 일이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인간의 감각에 의해 느낄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러한 일에 관한 의문을 모두 없애준다.
바울의 신앙에 대한 정의는 이와 같은 개념에서 나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확신)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실증 또는 증명)니" 이러한 신뢰의 감정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각기 다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실, 신앙에는 미약한 믿음에 지나지 않는 초기 단계 즉 망설임과 두려움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에서부터 회의나 변론을 단호히 막을 수 있는 강한 신뢰에 이르기까지 많은 단계가 있다.
믿음이란 지적인 동의만을 의미하는 반면에 신앙은 실천에 옮기게 하는 확신과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위있는 사전에는 믿음이란 어떤 진리 또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말하며 그러한 동의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은 믿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하는 문제라고 정의되어 있다. 믿음은 수동적이며 동의 혹은 수긍이라 말할 수 있는 반면, 신앙이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실천에 옮기게 하는 확신과 신뢰를 말한다.
얼마전 사석에서 한 목사가 “새로운 100년의 화두는 무엇이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당시 얼른 대답하지 못했지만 ‘신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의 신앙이 행함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스스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는 예감이 그것이다.
이민 100주년이 주는 메시지는 ‘행하라’는 것이다. 교계와 사회는 결코 구분할 수 없다. 우리는 교인이면서 사회인이고, 사회인이면서 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계는 나와서 비춰야 한다. 빛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불을 켜서 말아래 두는 것은 어리석다. 용기가 필요하다. 한인사회에 나오는 용기, 부도덕한 인사들의 야유와 냉대, 따돌림을 딛고 이겨내는 용기….
한인사회도 교회와 똑같이 사랑과 정직, 존중과 양보, 질서, 그리고 희생과 겸손이 필요하다. 교회의 이런 기본 정신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좋은 환경을 만들지 못한다면 신앙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교회의 기능은 기형적으로 변형될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종교
며칠전 교회협의회가 한인회관 부속건물 정상화를 위해 적지않은 돈을 기부하고 ‘재외동포법 폐지 반대 100만 동포 서명운동’과 ‘한인회비 납부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기로 하는 등 한인사회 여러 현안에 참여, 책임있는 한인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자 한인사회 곳곳에서 이민 100주년의 정신에 부합되는 ‘통합의 청신호’로 환영의 뜻을 표시하고 반색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날, 파열음이 교계 내부에서 수면위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교회가 세상일에 너무 나선다’는 논리로 교회협의회 지도층을 흔들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계 내부의 균열은 목사들간, 각 교단간 복잡미묘하게 전개되고 알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인사회 화합에 교계의 역할을 고무적으로 바라보며 기대하던 한인들이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종교가 무엇인가? 또 이민 100주년의 정신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되는 것인가? 특수한 이민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은 그야말로 크고, 사실 교회의 협조없이 한인회 산하 어느 모임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감안할 때 교계의 일거수 일투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의 궁극적인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인류에게 이익을 주는 산업상의 추구, 인간을 기쁘게 하고 순화시켜주는 예술, 인간의 지성을 넓히고 높이는 학문-, 이러한 것들은 영원하고 무한한 근원에서 이 지상으로 나온 방대한 진리의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신학은 관찰하여 밝혀진 진리를 질서 정연하게 제시하고, 그것이 인생사에 적용되는 방법을 말해 준다. 허나 신학적인 지식에 정통한 사람도 종교적인 면에서나 심지어는 도덕적인 품성에서조차 크게 결여될 수도 있다. 신학이 이론이라면 종교는 실천이다. 신학이 교훈이라면 종교는 모범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보완하여 완전해 질 수 있다. 신학적인 지식은 종교적인 신앙과 실천을 강하게 해 준다.
학문으로써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지식을 주로 지성으로 다루는 것이나, 종교는 그러한 지식 또는 참된 믿음을 개인의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지금 한인사회나 교회는 지도자들의 긴 안목과 폭넓은 비젼이 요구되는 시점에 와있다. 보통 사람들보다 편협하고 그들의 변화와 기대치에 부응할 수 없다면 이미 지도자가 아니다. 진부한 사고의 틀을 깨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혜안을 기대한다.
<편집·취재부장 ejlee@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