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들을 예전부터 좋은 말로 표현한다면 일반적으로 작가라고 말하고, 구별해서 말하면 소설가, 평론가, 시인, 수필가 등등으로 말 하지만 비하해서 말해서 ‘글쟁이’라고도 말했다. 20세기 초에는 가장 가난한 직종의 존재로 호구지책도 해결하지 못하는 ‘글쟁이’로 통했다.
쟁이라는 말은 뚜쟁이, 점쟁이, 미장이, 옹구쟁이 등 저소득층이였으며, 그중에 글쟁이도 포함 되었다. 그런데다가 일제 억압속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을 자유롭게 쓰고 싶어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한글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글쟁이들은 해방이후 우리말로 쓸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잠자고 있던 작가들이 한국어로 마음대로 표현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 셈이다.
필자는 20대 초에 해방을 맞았으므로 그때가지 일어(日語)를 주로 읽고, 쓰고 배웠다. 20대 가정주부가 된 후 10년 동안은 가사에 몰두했다. 해방이 되고, 6.25를 겪은 뒤, 그 당시 서양의 문물이 유행처럼 번질 때 영어 붐이 새 시대 바람을 탔고 또, 댄스를 배우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다. 나는 막내가 막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30대 늦깎이로 대학을 졸업했다.
공교롭게도 졸업 5년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내가 ‘글쟁이’가 된 것은 이 나라에 와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나라에서 2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만기 은퇴 할 때까지의 애환의 글은 이미 두권의 에세이 집에 기록한 바 있다. 주로 이 나라에 와서 겪은 고생담을 보고, 들은 느낀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뜻에서는 많은 이민자 들에게 고된 초기 이민 생활에서 내가 겪었던 그 많은 고충이 혹시라도 그들에게 조그만 위안이 된다면 내가 ‘글쟁이’가 된 보람을 느낄 수 있겠다.
1975년 처음으로 L.A 중앙일보에서 모집하는 첫 해외동포 주부생활 현상모집에 응모할 때는 마침 내가 담랑 수술을 받고 휴양중이었던 때였다.
우수상 없는 입선작이였지만 나의 글쟁이 시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은퇴 후 미국 시니어 센터에 영어 창작반에서 2년동안 배우고 동아리에도 참석했다. 지금은 21세기 최첨단 기술이 발달되면서 펜으로 또박 또박 쓸 필요도 없고 화면으로 보고 듣는 세대가 되었다. 그럼으로 인해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고등에서부터 아이들까지도 남의 손을 빌어 자서전을 쓰는가 하면, 기행문도 펴 내기도 한다.
직업적 작가들도 많지만 명예, 입신을 위해서 작가들의 손을 빌어 쓰는 사람도 많다. 글을 쓴다고 해서 다 글쟁이는 아니지만 글을 쓰다보면, 가끔은 사회 부조리에 대해 쓸 때도 있고 주위환경의 여러면을 보고, 쓰는 것이 글쟁이들의 표현이다.
어떤 때는 독자, 혹은 친지들로부터 혹독한 화살을 받을 때도 있고, 큰 오해를 받는 때도 있다. 나는 글이란 쓰는 이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자유, 자아 분출의 표현’ 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래서 나는 어떤 작가라는 ‘타이틀’보다는 ‘글쟁이’라는 이름으로 남아도 글은 독자가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윤열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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