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갑자기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이렇게 세월이 막 가도 되는 것일까?
TV를 끄고 라디오도 끄고 수도꼭지조차 단단히 잠그고 텅 빈집에 홀로 앉아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미세한 소음들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어보자.
밖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나를 진정시키고 비로소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간, 가장 솔직하게 깨어있는 나를 보는 시간, 스스로를 발견하는 그런 시간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이 해의 마지막 주에는.
향기 좋은 차를 한 잔 끓여 앞에 놓고 조용히, 아주 천천히, 차 한잔을 음미하면서 지난 1년을, 지나온 세월을 되돌려보자. 남편이든, 아내든, 아이들이건 속 썩이지도 말썽부리지도 않음에도 가족을 떠나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 자신으로 돌아와 내가 사는 이것은 무엇인지,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잘 가고 있는 것인지, 지금 이렇게 살려고 어린 시절의 내가, 20대의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인지를 돌이켜 보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인지, 작년에 시인 로버트 핀스키가 미국인의 최고 애송시를 조사한 결과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선정됐다고 발표했었다.
그 시 중 에서도 특히 “숲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네. 그리고 난.....좀처럼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택했지.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네.” 부분이 가장 사랑을 받고 있다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이 길을 가지 않고 저 길을 갔더라면 내 삶의 방향이 달라졌겠지, 지금의 처지와 완전히 다르겠지 하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어느 정도 갖나보다.
‘내가 만일 미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있을 것인가?’
아마 한인들 대부분은 미국에 잘 왔지 하는 결론을 내릴 것 같다. 그렇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 미련은 어느 정도 있을 지라도,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아마 지금 온 길을 다시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수록 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가보고 싶어지는 것일까? 장차 어떤 길을 가게 될 지 막연히 꿈꾸면서 자라던 어린 시절의 흔적을 보고싶은 것일까?
나는 지난 여름휴가동안 한국을 방문, 태어나서 10살까지 자란 부산의 한 동네를 찾아가 보았다. 무려 30년도 더 지나서 생전의 부모님과 언니들, 오빠들이 함께 살던 집을 찾아 나를 찾는 여행을 했었다.
눈부시게 발전한 도시 한 복판 빈민화 된 동네 속에 그 집은 새로 지어진 채 남아있었고 내 유년 시절은 그곳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영덕으로 가서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친정 동네를 지명 하나만 들고 가 찾아내었다.
어머니조차 친정붙이가 아무도 살고있지 않음으로 수십 년 간 발길을 끊었던 그곳을 찾아가 어머니가 졸업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푸른 하늘과 자작나무 숲을 보았고, 수국과 봉선화·석류나무가 있는 옛 외가집 풍경을 눈에 담고 왔다.
그리고 뉴욕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미국에서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 해를 보내면서 지나온 세월이 덧없는 것 같아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것들이 위로를 주고 힘들 때면 용기도 준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다들, 9.11의 충격으로 기가 막힌 한 해를 보냈겠지만 조용히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 의미 있었던 한 구석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고통스런 일이든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든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위안을 찾을 틈새가 있는 것이다. ‘지난 1년이 너무 고통스러웠어 어서 지나가야 해’ 하거나 ‘제발 좀더 머물러 줘.’ 하고 붙잡아도 2001년은 며칠만 지나면 냉정히 손을 뿌리치고 갈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 해, 홀로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내가 걸어온 길과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겨보지만 결론은 언제나 나 있다.
하지만 이 해의 마지막 주라서 그런가? 왜 이런 상념들이 생겨나는 것인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