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9년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서 연수를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근처에 살던 한국 공군 유학생 정희진 중령이 저녁에 찾아와 할 얘기가 있다고 나를 불러냈다. 별 생각 없이 나갔다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아들 녀석이 다니는 레빤또 초등학교가 이날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우리애가 점심시간에 학교 담장 한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슬피 우는 바람에 담임 교사는 물론이고 교장까지 나서서 이유를 캐묻고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정 중령은 이 사실을 같은 학교에 다니는 딸에게서 듣고 걱정이 돼 전해준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놈에게 물었더니 그제 서야 그런 일이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데다 고학년 생들이 수시로 괴롭히는 바람에 학교에서 울었다. 이곳이 너무 싫다. 한국으로 돌아가자.
가족 모두가 돌아갈 수 없다면 나만이라도 고모나 할머니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흐느꼈다. 또한 그런 일을 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엄마 아빠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고 자존심상하는 일이어서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들놈이 그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고 이를 눈치채지 못한 나의 무신경이 한스러웠다.
나름대로 이상적인 부자(父子) 관계를 맺고 있다고 자부해왔던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뒤늦게 공부한 스페인어로 대학 강의를 따라 가려니 죽을 지경이어서 잠시나마 아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가 그처럼 뼈아픈 사태로 이어진 것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찾아갔더니 담임 교사가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다며 펄쩍 뛸 듯이 반겼다. 교장과 함께 3명이 의논한 결과, 스페인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쳐 언어소통문제를 일단 해결해주고 최소 일주일에 한번씩 담임과 내가 만나 의견을 교환하기로 했다. 가정과 학교가 적극 관심을 기울이고 공동 대처하자 아들놈은 금새 활기와 자신감을 되찾아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당시 새삼 실감한 사실은 12살짜리도 나름의 세상과 생각을 가졌으며 자존심상할 일이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당시를 되돌아보면 아찔하다. 만약 정 중령이 나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아들놈도 입을 다물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아마 아들놈은 어느날부터 무단결석을 하다 점점 더 되돌아 올 수 없는 엇길로 나갔을지 모른다. 다행히 아들 녀석은 이제 만족해하는 대학에서, 사회에 진출해 제몫을 할 만한 전공을 택해 공부하고 있다. 지금도 당시 얘기를 하면서 아들놈을 놀리면 내 입을 틀어막고 간지럼을 태우는 등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만든다.
나는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부모의 책임이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가 문제아가 되고 안 되고는 전적으로 부모 잘못이라고 믿는다. 성적은 본인의 노력, 지능, 부모의 뒷받침 등으로 좌우된다.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죄책감을 가질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아는 다르다. 부모의 애정과 꾸준하면서도 적절한 관심만 계속 주어진다면 결코 자녀는 비뚤어지지 않는다. 문제아란 부모의 작품임을 정의하는 이유다.
주말,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보면 넓은 공원에서 어린이 등 청소년들이 갖가지 경기를 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부모가 동참, 심판을 보거나 최소한 좋은 관객 역할을 해주는 게 특이했다. 좋은 스포츠 시설도 부러웠지만 특히 부모들이 주말을 자녀와 함께 하는 것이 보기에 흐뭇했다. 저렇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라는 어린이 경우 비뚤어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의 달 5월이 지났다. 그러나 가정의 달에만 가정 특히 자녀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일은 아니다. 가정의 달은 일년 열두달 365일이어야 한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가진 가장들은 주말을 골프장에서만 보낼 게 아니라 미국 아버지처럼 함께 뛰고 여행하고 대화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으면 한다. 그것이 가장 귀하면서도 큰 재산인 자녀를 바르게 키우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