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한국이 일본서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주한 미군정청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경복궁안의 한 건물에 내 사무실이 있었다. 할 일은 많고 봉급은 빈약해 가족을 부양할 수입을 늘리기 위해 몇가지 부수적인 일자리를 가져야 했다.
그래도 군정청 일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한인과 미국인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역시 한인, 미국인 친구들과 경회루옆 연못을 여유롭게 산책할 수도 있었다.
해방후 첫봄은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봄 중의 하나였다. 제비꽃, 민들레, 벚꽃이 만발한 궁궐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날 오후, 한낮 산책에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20대의 한 젊은이가 내 책상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일어서서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저는 빈입니다.”라고 인사했다.
2년간 그를 보지 못했으나 나는 그를 즉각 알아보았다. 그는 내가 가르쳤던 고등학교에서 최우수 학생들중 한명이었으며, 영어와 음악에 탁월했었다.
간단한 대화를 가진 후 그에게 내 사무실에서 일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을 부서책임자에게 소개했더니 즉시 그곳에서 내 일과 같은 일을 빈에게 주었다. 그에게는 반나절동안 서울대에 출석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풀타임 교직에 돌아가기 위해 몇 달 후 내가 그 일을 그만둔 후에도 빈은 그곳에 남아있었다. 그에 따라 그는 미국 유수 대학에서 공부하는 정부장학생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빈이 학위를 받았을 때 정부 주요부서의 책임자 일자리가 보장돼있었다. 귀국하는 길에 그는 당시 내가 일하고 있던 도쿄에 들렀다.
그가 우수한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도쿄에서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그에게 추천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관심없다고 말했다. “제가 귀국하면 월급이 4달러 수준밖에 안되겠지만 우리 정부 일자리를 택할 생각입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도 나는 도쿄에 있었다. 어느날 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적인 일로 도쿄에 들렸다고 했다. 나는 즉각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갔다. 그는 아직도 같은 행정부의 부서 책임자라고 말했다. 그는 국장으로 승진할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대화가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생 혁명이 있었고 그 1년 후 군부가 정부를 장악했다.
빈은 오랜동안 갈망해왔던 국장 자리로 승진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승진記譴貶〈 차관이 되었다. 이어서 장관으로 유럽에 보내어졌고 다시 대사 신분으로 승진했다.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므로 그러한 외교관직이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자리였다.
어느날 빈은 대사직에서 사임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한 대학의 총장으로 초빙 되었다. 그는 수년동안 그곳서 훌륭하게 일을 했다.
그후에는 행정부 각료가 되었다. 각료로 재직한 기간은 짧았으나 거기서도 업무수행을 잘했으리라 생각한다.
1945년 이후 거의 지속적으로 한국정부를 위해 중요한 일을 했던 인재를 그리 많이 생각해낼 수 없다.
봉급을 100배나 더 많이 받는 자리를 얻을 수 데도 4달러 월급의 일을 택했던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