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을 모르는 딸도 있을까요? 불효 막심한 딸. 바로 제가 그 딸입니다. e-mail로 본 아버지의 사진은 몹시 충격적이었습니다. 안심시키려는 듯 웃고 계신 쇠약한 아버지의 모습. 가끔 한국으로 전화하면 "간단한 수술이다. 걱정할 것 없다."고 말씀 하셨었는데. 남동생이 아버지의 최근 사진을 보내면서 한번 다녀가는 것이 좋겠다고 전해왔습니다. 바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우리 가족을 보러 해마다 오셨던 부모님은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미국방문을 두해나 거르셨습니다. 아이의 방학이면 늘 오시던 부모님 때문에 한국에 대한 향수가 없이 지낼 수 있었는데 한국 다녀온지도 헤어보니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만의 귀향길. 마침 한국의 추석과 겹쳐 더욱 실감났습니다. 딸을 마중하기 위해 약한 아버지는 공항에 나오셨습니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붉은 칸나가 길섶에 피어있는 김포로를 지나 넓은 자유로로 들어섰습니다. 생전 처음 가보는 일산 가는 길. 큰길을 따라 가다가 옥색으로 칠한 아파트 단지가 보이면 우회전을 해야합니다. 이가네 설렁탕이 보이면 다시 좌회전을 하고 왼편에 있는 아파트로 들어오려면 유턴을 해야합니다. 유턴할 때 밀집한 러브호텔의 기기묘묘한 지붕에 한눈 팔면 안됩니다. 비보호 유턴이므로 조심해야지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대화동 장성마을’ 이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입니다. 학교 앞에 유흥시설을 마구 허가해 주었다고 집집마다 항의하는 노란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어릴적 살던 마당 넓은 연희동집도 아니고, 어머니가 정성 들여 지었던 홍제동집도 아닌 내겐 낯선 아파트가 부모님 집입니다. 손님처럼 집 구경을 하였습니다. 책장과 벽에 걸린 그림만 익숙하고 살림은 모두 간소하고 편리하게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운전을 못하시는 늙은 어머니에겐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 많아 보였습니다. "염려 말아라. 가수 누구도, 코메디언, 탈렌트 아무개도 이 동네 산다. 대통령도 살다간 동네 아니냐?" 엉뚱한 대답으로 딸을 안심시킵니다.
아버지가 근심스러워 왔다는 딸은 도착한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외출합니다. 동창을 만나러, 교회의 옛친구들을 만나러, 한때의 직장동료를 만나러 압구정동으로 광화문으로 예술의 전당으로 신라호텔로 심지어는 부산까지 설치고 돌아다녔습니다. 너무 바쁘다보니 친척들도 일산으로 와야만 했습니다. 인사 받으러(?)오신 어른들을 뵈니 아픈 사람은 아버지뿐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와서 사는 동안 큰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작은아버지도 몰라보게 야위셨습니다. 큰고모는 노환으로, 작은고모는 관절수술로 거동이 불편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아이들은 너무 자랐고 어른들은 무척 늙었습니다. 많은 변화에 눈물이 났습니다. 내겐 마치 잃어버린 세월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장 불편해 보이는 휠체어에 의지한 작은고모가 나의 눈물을 보고 말합니다. "우린 이제 다아- 산세대요, 가는 세대다. 가는 세대는 오는 세대가 잘되기만 바라고 살았다. 자손들이 모두들 잘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 늙으면 병들고 고장나는 것 아니냐?" 산전수전을 겪어오신 담담한 아버지세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 옆에서 몇 밤 자고 아버지와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려던 나의 계획은 그저 계획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혼만 빼놓고 가는 딸을 배웅하러 또 공항에 나오신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나 보다도 네 건강이 더 걱정이다. 너무 바쁘게 살지 말고 일도 조금 줄이고 몸도 살펴라" 건강한 중년의 딸에게 병든 아버지가 하는 당부입니다. 아 아 아버지. 아버지가 걱정 안 해도 좋을 자식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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