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준우가 만난 셰프들 - 이상훈 셰프 겸 스페인 고메 대표

이상훈 셰프가 2024년 제주도에서 자신이 요리한 파에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상훈 셰프 제공]

이상훈 셰프가 2022년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요리한 파에야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훈 셰프 제공]

스페인식 주키니 수프. 이상훈 셰프 제공
세상의 모든 요리사가 주방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만 승부를 보는 건 아니다. 어떤 요리사는 칼 대신 길을 택하고, 레시피 대신 이야기를 수집한다. 햇살 가득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활동하는 이상훈 셰프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현재 스페인 현지의 식재료를 발굴해 한국에 소개하는 '스페인 고메(Spain Gourmet)'의 큐레이터이자 미식 가이드, 그리고 작가로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요리가 음식을 매개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가 하는 일 역시 요리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삶의 갈증 풀기 위해 요리를 찾았다
이 셰프는 한국에 있던 시절, 소위 잘나가는 대기업 외식 마케터였다. 핫한 브랜드를 론칭하고 법인카드로 전국의 맛집을 누비며 보고서를 쓰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주방 밖의 일들을 섭렵할수록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차올랐다.
"주말마다 친구들을 초대해 홈 파티를 열었어요. 야근과 스트레스로 점철된 삭막한 평일의 보상을 요리에서 찾았죠. 제가 만든 음식을 먹고 사람들이 짓는 그 표정을 보는 게 참 행복했습니다."
주방 밖의 모든 일을 경험해봤지만, 결국 주방 안에서 만들어지는 행복을 직접 빚어내야만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그는 서른셋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안정된 궤도를 이탈했다. 아내의 든든한 지지 속에 사표를 던진 그는 파스타 식당의 말단 요리사로 들어갔다. 수입은 반토막이 났고 하루 종일 설거지를 하며 몸은 부서질 듯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비로소 평온해졌다. 그러나 서른을 넘긴 신입 요리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많지 않았고, 그는 더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 목적지는 신혼여행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스페인이었다.
2018년, 그는 아내와 함께 바르셀로나 인근의 명문 호텔 조리학교 'EUHT St.POL(산폴)'로 떠났다. 졸업 후에는 카탈루냐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모먼츠(Moments)'와 '티켓(Tickets)' 등에서 수련하며 스페인 음식의 최전선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길 대신 새로운 행보를 택했다. '요리사라고 해서 반드시 주방 안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 주방 밖에서도 요리사로서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들이 정말 많다'라고 일러준 스승의 한마디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주방의 열기 속에서 접시를 내는 대신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식탁 자체를 한국에 소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는 경력 단절이라기보다 요리사라는 정체성의 확장이었다.
■'함께하는 요리' 파에야의 매력
이 셰프가 전달하고자 하는 스페인의 본질은 '파에야(Paella)'에 응축되어 있다. 그는 많은 한국 여행객이 관광지에서 '인증샷'용 파에야에 집착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파에야는 원래 발렌시아 농부들이 새참으로 먹던 향토 음식이다. 들판에 널린 오렌지 나무로 불을 피우고, 그 지역에서 나는 토끼고기와 콩, 달팽이를 넣어 쌀과 함께 볶아내던 투박한 요리다.
"파에야의 진정한 매력은 여럿이서 함께하는 요리라는 점이죠. 야외에서 커다란 팬을 걸고 불을 피우는 순간부터 파티는 시작됩니다. 육수가 끓고 쌀이 익어가는 한두 시간 동안 사람들은 팬 주위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떱니다. 육수가 부족하면 같이 부어주고, 무거운 팬을 함께 들어주는 과정 자체가 요리의 일부죠. 파에야는 둘이서 먹는 음식이 아니에요. 최소 4~5명이 모여 그 긴 조리 과정을 공유해야 해요. 레시피보다 중요한 건 누구와 어떤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느냐는 것이죠. 파에야를 통해 음식이 사람을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는 파에야의 그늘에 가려진 스페인의 다른 쌀 요리들, 국물이 자작한 '아로스 멜로소(Arroz meloso)'나 국밥처럼 든든한 '아로스 칼도소(Arroz caldoso)'의 매력을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오히려 이런 가정식 스타일이 더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 접시 너머의 세상
이 셰프는 현재 자신의 식당을 운영하지 않는다. 요리사로서 업장에 대한 동경이 왜 없겠냐마는, 그는 지금 이 시기에만 가능한 ‘아버지로서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스페인 아빠들은 육아에 정말 진심이에요. 저도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전국의 미식 축제를 다닙니다. 아스파라거스 축제, 잠두콩 축제 같은 곳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식재료가 자라는 땅을 보여주죠. 비록 혼자 다닐 때보다 기동력은 떨어지지만, 아이들과 함께 느끼는 풍경과 맛이 저에게는 가장 큰 공부이자 인생의 축제입니다."
그의 활동을 관통하는 철학은 '마스 아야 델 플라토(접시 너머)'다. 단순히 맛있는 접시를 내는 것을 넘어, 그 식재료가 어떤 시간을 견디고 어떤 사람의 손을 거쳐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가 한국에 소개하는 올리브유와 셰리 식초에는 그런 고집스러운 생산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국립공원 안에서 100년 넘은 올리브 나무를 키우는 친구가 있어요. 가뭄이 들어 열매가 말라가도 절대 인공적인 관개 시설을 설치하지 않죠. 조상 대대로 해왔듯 오직 하늘이 주는 빗물과 자연의 힘으로만 키우겠다는 뚝심입니다. 생산량은 줄어들지언정 땅의 정체성은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런 생산자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요리사로서, 또 인간으로서 깊은 경외심을 느낍니다."
그는 세계적인 셰프 안도니 루이스 아두리스가 운영하는 무가리츠(Mugaritz)의 실험적인 요리에서도 비슷한 감동을 받았다. 맛이 없다고 화를 내며 나가는 손님이 있어도 결코 자신의 철학을 굽히지 않는 뚝심은 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한국의 외식 환경과는 대척점에 있는 모습들이다.
그는 스스로를 '스페인을 가장 많이 다녀본 한국인 요리사'라고 자부한다. 현지인조차 가보지 않은 오지의 마을과 축제를 찾아다니며 데이터를 쌓았다. 북부 갈리시아의 투박한 해산물 요리부터 태양이 작열하는 남부의 차가운 아몬드 수프인 아호 블랑코(Ajo Blanco)와 흰 생선 수프 가스파추엘로(Gazpachuelo)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스페인 전역의 맛과 풍경이 지도로 그려져 있다.
"요리사는 주방이라는 공간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스페인의 풍부한 식재료와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한국에 전달하는 '문화 전달자'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쌓고 있는 이 경험치들이 결국 접시 위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 믿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5년쯤 뒤, 작은 식당을 열고 싶다는 꿈을 수줍게 내비쳤다. 스페인에서 배운 그 뚝심과 여유, 그리고 한국적인 터치가 가미된 요리를 내놓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전까지 그는 여전히 스페인의 길 위에서 시간을 요리할 것이다.
이 셰프와의 대화는 짧은 여행 같았다. 그가 건네준 것은 레시피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속도와 사람을 향한 환대였다. 말라가의 따뜻한 바람을 닮은 그의 이야기가 한국의 주방과 식탁에도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길 기대해 본다. 접시 너머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따뜻한 세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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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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