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한인사회에는 단체가 얼마나 될까. 기자로서 수많은 단체를 접했지만, 아는 단체보다 모르는 단체가 더 많을 것이다. 최근 통계는 아니지만 2010년대 중반에 LA 총영사관 관할 한인 단체만 해도 200개가 넘었다고 하니, 최근 유입 인구 감소로 숫자가 조금 줄었다 해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규모일 것이다.
한인 단체의 성격은 제각각이다. 한인들이 거주하는 각 지역 한인회를 기본으로 경제단체, 봉사단체, 향우회, 친목단체까지 단체의 종류와 성격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이 모든 단체들을 2개로 극명하게 나눌 수가 있는데, 그 기준은 실제로 일을 하는 단체와 감투와 친목을 목적으로 이름만 있는 단체라는 것이다. 한인회 중에서도 실제 활동보다 연락도 되지 않은 단체와 단체장만 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말 다 했다.
기자로서 나는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단체를 선호한다. 경제단체라면 한인 경제 활성화를 위해 명확한 사업을 이끄는 곳, 봉사단체라면 단순히 불특정 다수를 돕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선별하는 곳이 그렇다. 아무리 번지르르한 말로 좋은 목표를 내세워도, 활동이 모호하거나 포괄적이면 별 감흥이 없다.
얼마 전 취재한 한 단체는 자신들을 ‘750만 한인 동포를 아우르는 단체’라 자부했다. 실제로는 미주 한인 약 200만을 대표하는 조직일 텐데, 관계자가 전 세계 한인 수인 750만과 혼동한 듯했다. 총회 현장은 그야말로 흥미로웠다. 두 명의 회장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고, 회의 내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부 관계자가 거친 언행을 내뱉으면, 듣고 있던 사람들은 더 거친 말로 되받아쳤다.
특이점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단체 행사를 취재하러 온 기자를 내치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이 단체는 기자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 기자는 정식 취재 요청을 받고 방문한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행사장을 바라보고 있는 기자들에게는 투표소 사진을 찍지 말라고 엄격히 경고하면서도 “그 정도 찍으면 되지 않았냐”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선거나 총영사관에서 부재자 투표를 진행할 때보다도 철저한 보안이었다. 미주 한인을 대표한다는 단체가 한인들에게 단체 소식을 알리겠다는데 왜 그렇게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찌됐건 철저한 보안 속에서 투표가 이루어졌고, 각 지지자 진영의 대표들이 참여해 공정하게 개표를 진행했다.
그날 총회는 모든 공식 행사가 끝난 뒤 벌어진 뒷풀이에서 단체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호텔 행사장은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했다. 테이블마다 술이 넘쳐났고, 몇몇 테이블에서는 또다시 고성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전 미주 한인을 대표한다는 조직, 정치력 신장과 차세대 정체성 함양을 목표로 삼는 단체라기에는 꽤나 화끈한 모습이었다.
새로 선출된 회장은 주요 공약의 구체적인 실현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대표 사업 없이 존재감을 주장하는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자리에는 기자가 평소 존경하는 인사들도 있었는데, 술판이 벌어진 현장을 민망해하는 듯 시선을 피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 갑자기 식사 기도를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음주가무가 이어졌다.
놀고 즐기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흥 많은 민족이니 즐길 수도 있다. 다만 미 전역에서 어렵게 모인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소중한 시간과, 단체를 위해 쓸 수 있었던 정성과 노력의 마무리가 유흥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남았다.
단체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실제 영향력과 책임이다. 단순히 회원 수와 이름을 내세운다고 해서 한인들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인들을 대표하는 조직이라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름만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이들에게, 진정한 책임은 무엇인지 묻고 싶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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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경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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