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국 경주에서 열린 아펙(APEC) 정상회의가 알찬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질질 끌던 한미관세협상이 좋은 조건에서 타결되었고, 트럼프와 시진핑과의 연쇄 정상회담도 우호적으로 끝났으며, 천년도시 경주의 문화유산을 활용한 세련된 접대로 21개 회원국 정상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보도가 잇달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에게 번쩍이는 금관과 무궁화훈장을 선물한 것은 지나치게 노골적인 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왕이 되고 싶었던 윤석열과 김건희의 최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시국에, 그보다 더 큰 제왕적 권력을 휘둘러 미국에서 ‘노 킹’ 시위가 계속되는 와중에 왕관이라니…, 미국의 소셜미디어와 온라인에서는 “한국이 금관과 핵잠수함을 맞바꿨다”며 연일 왕관 쓴 트럼프를 조롱하는 사진과 동영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트럼프 취향을 확실하게 공략한 선물공세로 국익을 챙긴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한국정부를 보며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편 이 행사에서 정상들에게 대접한 음식들도 하나하나 공개됐는데 그 중에 특별히 눈길을 끈 대목이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및 7개국 정상이 함께 한 만찬이 그것이다. 메뉴는 영월 오골계와 트러플 만두, 경주 한우등심과 송이버섯, 구룡포 광어, 지리산 양식 캐비어를 곁들인 최고급 코스요리였는데, 여기서 만찬주로 ‘트럼프 와이너리’의 샤도네와 카버네 소비뇽이 올랐다는 것이다.
트럼프 와이너리? 아니, 트럼프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무슨 와이너리? 궁금해서 찾아보니 트럼프의 둘째아들 에릭이 버지니아 주 샬로츠빌에 1,300에이커나 되는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러 매체와 웹사이트에 따르면 트럼프 와이너리는 버지니아 주의 300여개 와이너리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생산량(연 3만6,000케이스)은 세번째로 많은 곳이다. 멋진 테이스팅 룸이 있고, 럭서리 호텔과 고급 식당도 운영하는 등 사진만 보아도 매우 인상적인 포트폴리오를 자랑한다. 하룻밤에 799달러씩 하는 호텔은 로코코스타일 장식의 극치, 황금빛 찬연한 가구들과 샹들리에, 벽지 등 그야말로 완전 트럼프 스타일이다.
와인은 여러 종류의 화이트와 레드, 스파클링과 디저트 와인 등 20여종을 생산하고 있는데 가격은 20~80달러 수준으로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프레지덴셜 리저브’라 이름 붙은 스파클링 와인은 245달러, 에릭 트럼프가 병에 사인한 2021 뉴월드 리저브 매그넘(1.5리터)은 무려 1,499달러나 한다. 대통령과 가문의 이름을 팔아 장사한다는 인상이 짙게 느껴지는 곳이다.
뉴욕타임스 와인전문가의 시음기를 보니 트럼프 와이너리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1마일 넘게 수백개의 성조기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기프트 샵에서는 엄청 많은 마가 관련 상품들을 팔고 있다. 기사 제목이 ‘애국심을 병에 담아 파는 곳’(Trump Winery, Where Patriotism Is Sold by the Bottle)이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와인 맛은 대체로 평범하고 별 특징도 일관성도 없는 수준이지만 원근각처에서 오는 트럼프 추종자들로 테이스팅 룸은 연일 문전성시라고 한다.
그런데 진짜 놀란 것은 이 와이너리의 매입과정이었다. 트럼프는 2011년 와이너리를 사들여 아들에게 주었는데, 이때 발휘한 날강도 같은 ‘거래의 기술’(트럼프 저서)이 현지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와이너리의 창립자는 패트리샤 클루지, 억만장자 존 클루지 아내로 사교계 명사이며 트럼프 부부와 4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녀는 1990년 이혼하면서 엄청난 부지와 45개 방을 가진 대저택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전 재산을 쏟아부어 1999년 포도원과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유명 와인메이커들을 많이 기용한 덕분에 상도 많이 받고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저택까지 담보로 대출받아 와인사업을 확장한 것이 문제였다. 2008년 부동산 시장 붕괴와 금융 위기가 닥치자 그녀는 파산했다.
패트리샤는 저택과 와이너리를 너무나 부러워했던 트럼프에게 사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했고, 트럼프는 와이너리가 소더비 경매에 1억 달러의 매물로 나왔으나 매입자가 없어 3개 은행의 압류 절차를 거친 후 620만 달러까지 내려가자 바로 구입했다.
명물로 꼽혔던 대저택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따로 1,600만 달러에 저당권을 사들였는데 트럼프의 술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670만 달러에 빼앗겼다. 그 술수란 저택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땅을 하나하나 인수한 후 곳곳에 ‘출입금지’ 표지판을 설치한 것이다. 결국 저택 안 화장실을 가려해도 트럼프 땅을 거쳐야 하니 출입이 불가능해졌고, 저택 주변은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어 다른 잠재 구매자들을 막아버렸다. 마침내 BoA는 트럼프의 최저가격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골프장이 포함된 1.300에이커 와이너리와 부지 전체를 헐값에 인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아들 에릭에게 소유권과 운영권을 모두 넘겨준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이런 트럼프의 ‘거래의 기술’에 농락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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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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