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선은 신의 선이며 직선은 인간의 선이다”
▶ 헤밍웨이의 방과 투우장 그리고 달리와 가우디
스페인으로 조개라는 뜻의 콘차 해변. 그 모습이 조개를 닮았다.
산사바스티안과 헤밍웨이
좀 더 머물고 싶은 빌바오이었다. 구겐하임에서 일하는 몇 사람에게 당신은 바스크 사람이냐 스페인 사람이냐 물으면 물론 바스크 사람이지 하면서 자기들은 자기네 말과 글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화의 공존이지 투쟁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좀 더 이 지역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으면 하기도 했고, 그 유명한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Gernika)의 게르니카 마을이 그리 멀지 않아 그냥 지나가는 것이 몹시 아쉽기도 했다.
북 스페인 기행 중 처음으로 해안가에 도착했다. 산사바스티안이란 도시이다. 이곳의 온다레타 해안은 한때는 유명한 무역항이었다고 하나,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 때에 항전하다가 완전히 폐허가 되고 이 후 왕족들이 휴양지로 쓰인 이후 도시 전체가 이제는 휴양, 관광 도시가 되었다. 이곳 역시 바스크 사람들의 지역이라 간판에 그들의 글자도 보인다. 케이블카를 타고 몬테 이겔도(Monte Igueldo)로 올라가니 해안이 말 그대로 조개 모양이다. 조개라는 스페인어 콘차를 따서 콘차 해변(Playa de la Concha) 라고 부르는데 참으로 아름다웠다.
언덕에서 내려와 점심시간까지 시가지를 돌았다. 휴양 관광 도시라 기념품상이 꽤 많았다. 중세의 복장을 한 관광 안내원들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대성당과 시청 광장 또한 그런대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공산당의 행사이었다. 말을 못 알아들어 그 행사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열렬히 박수를 치는 사람들 틈에서 구경하였다. 이곳에서 공산당도 인기가 있는 당처럼 보였다.
이곳도 시내 중심은 광장에서 뻗어 나간다. 이곳에 대형 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었는데 점심은 소위 작지만 여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타파스(Tapas)이었고, 저녁은 갑오징어 먹물로 만든 빠에야이었다. 우리가 먹은 코너 방에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며 그의 실물 크기의 동상이 연결된 곳이었다. 어디를 가나 스페인에서는 헤밍웨이가 인기가 높다.
소 몰이 축제
산사바스티안을 떠나 팜프로나(Pamplona)로 향하고 있다. 불현듯 미남배우 타이론 파워(Tyrone Power) 얼굴이 떠오른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라는 소설이 헤밍웨이의 잃어버린 세대를 그린 작품이니 어쩌니 하기 전 고등학교 시절에 이 영화를 보았다. 장면 중에 소몰이 장면이 나오고 투우 장면이 나오고 했다. 그 미남배우 타이론 파워가 투우사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던 차 또 하나의 영화 ‘혈(血)과 사(沙)’ 라는 본격적인 투우영화가 나왔는데 이곳에서 타이론 파워가 투우사들 중에서 꽃이라 할 소위 마타도르로 나와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고 미녀에게 모자를 던지던 멋진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어린 고등학교 시절이라 문학성이니 무엇이니 보다 멋진 장면, 그리고 태양은 다시 뜬다 에서 요염한 여배우 에바 가드너, 혈과 사에서 사람을 뇌살을 시키는 리타 헤이워즈, 청순형의 린다 다넬 만이 기억에 있다. 바로 그 투우의 무대이자 그리고 헤밍웨이가 일생 18번 스페인 방문 중 9번을 이곳 팜프로나를 찾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 꽤나 그에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나는 매년 7월이면 소몰이 장면을 TV에서 보여주며 몇 명이 다치고 죽었다니 하는 연례행사가 벌어지는 팜프로나 시청 앞 광장에 도착하여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섰다. 바로 여기에서 군중들이 825미터 떨어진 투우장까지 소들과 함께 하얀 옷에 목과 허리에 붉은 띠를 하고 치이고 다치고 하면서 3분 달리기에 스릴을 맛보는 것이다.
본래 이 축제는 3세기 순교한 페르민 주교를 기념하여 1591년 이곳 나바라 왕국시대에 축제로 시작되었다. 우리 일행도 소가 없었고 달리기가 아니었지만 투우장까지 걸어서 갔다. 긴 좁은 길에 늘어선 3 내지 5층 건물 창문들은 모두 길 쪽으로 발코니가 있었다. 이 축제 시즌에 50만 명이 온다고 하며 그때에는 누구에게나 그 발코니는 무료로 개방해 준다고 한다.
투우장을 돌아보고 우리는 식당으로 안내 되었다. 그리고 훌 코스의 식사 중에서 최고의 핀초라는 식사를 즐겼다. 한 입으로 들어갈 음식들이 끊임없이 서브 되었다. 너무 음식의 종류가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난다. 그저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딱 하나있었다. 불란서 사람들이 최고로 친다는 거위 간이었다. 요리사가 직접 식탁에 와서 서비스도 했고 우리는 풍만함을 느끼며 이곳 팜프로나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스페인의 3대 화가 달리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휘게라스 방문은 오직 달리(Dali) 박물관 한곳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박물관 주차장으로 버스가 들어서니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많은 버스들이 정차해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관찰을 하니 프랑스에서 온 버스가 반을 넘는 듯 했다. 역사와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박물관 앞에 섰다. 역시 달리(Dali)답게 건물 외양이 요상하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그는 1904년 이곳 휘가라스에서 태어났다. 환상적 사실주의 또는 초현실주의라고 불리는 풍의 화가이며 판화가이기도 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가극, 발레리나 출연자들을 위한 의상을 만들기도 하고, 디즈니와 함께 드라마도 제작 하는 등 다재다능한 천재이다.
스페인의 3명의 천재 화가하면 피카소, 후안 미로와 그가 꼽힌다. 그런가 하면 그와 그의 부인 관계는 설명이 안 된다. 관음증 환자인지, 그냥 같이 산 것인지 모르겠다. 천재에다 이상한 사생활, 그래서 그런지 그의 박물관에 들어서면 그 작품세계가 어지럽다.
바르셀로나에서
내가 미술로서 이해하기가 쉬운 그림이 있는가 하면, 눈의 착시를 유발하는 그림, 3차원으로 보이는 그림, 설치 미술 같은 맛이 나는 방, 그런가 하면 세공 금속 공예 등 한참 보았는데 또 보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머리가 잘 정리가 안 되었다. 내가 천재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피곤한 몸으로 바르셀로나로 돌아 왔다. 바닷가에서 해물 빠에야에다가 홍합이 저녁 메뉴이었다. 물론 와인도 있었고.
나는 몇 년 전 이곳에 와서 3일 동안을 돌아 다녔었다. 그런데 워낙 볼 것이 많아 모든 것을 주마간산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lia Cathedral)만이라도 좀 집중적으로 보기를 원했는데 다행히 스케줄을 그리 잡아 주어 다행이었다.
성가족 성당 하면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를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바르셀로나 하면 곧 가우디이고 그리고 그가 바로 바르셀로나이다. 그는 1852년 카탈루냐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레우스는 본래 로마 시대에 항구로서 번창 했다고 하며 어린 시절 허물어진 유적지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어떤 영감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1926년 죽을 때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였으며 바르셀로나를 오늘의 바르셀로나로 탈바꿈시킨 건축가이다. 그리고 그 중에 그의 필생의 작품이 바로 성가족 성당이다.
성 가족 성당
“곡선은 신의 선이며 직선은 인간의 선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것처럼 성가족 성당은 이곳 바르셀로나 주변의 자연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건물이 모두 곡선이다. 또 이 건물의 제일 높은 탑이 예수 크리스토 탑인데 높이가 172.5 미터이다. 가장 높이는 짓되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산 높이보다 낮아야 한다는 그의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의 발로이다.
성가족 성당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사람이 누어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동쪽 왼팔은 ‘탄생의 문’이고, 서쪽 오른팔은 ‘수난의 문’ 남쪽 발은 ‘영광의 문’이다. 심장부분에 높은 예수의 탑이 솟아 있고, 머리 부분에 제단이 있다.
사실 가우디가 끝낸 작품은 왼 팔인 탄생의 문뿐이다. 그리고 오른 팔 수난의 문은 그 후대에 이루어 진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맛이 아주 다르다. 이 건물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사암으로 50 년을 숙성시킨 재료로 쌓아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가우디 자신도 자기 생애에 못 끝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가우디의 최후
나의 감상은 탄생의 문의 외벽의 조각을 보면서 시작 되었는데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오히려 내부의 조각, 장식, 창문 유리 등은 이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특히 조명으로 이용한 햇살에 비쳐지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나는 그만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떤 초라한(?) 복색의 노인이 길을 걷다가 차에 치여 길가에 버려졌다. 길 가던 행인이 택시를 세우고 응급실로 가자고 했으나 2대의 택시가 승차 거부를 했다. 결국 그 행인이 고생을 해 가며 병원으로 옮겼으나 누구 하나 눈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구질구질한 모습의 노인, 그 노인의 친구이자 전문 변호사의 아들인 의사가 지나가다가 마침 그를 알아보고 응급 조치를 하였으나 결국 세상을 등졌다. 그 노인이 바로 성당 건축에 몰두하며 작업복 차림으로 출근하던 가우디이었다. 지금 그는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고, 교황이 복자에서 성인으로 추대하려고 한다고 했으나 그의 최후는 그런 것이었다.
저녁은 해변에서 바다가재를 넣고 빠에아를 죽처럼 좀 묽게 요리한 것이었다. 합격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중심 거리인 람브란스 길가 카페에 앉아 모처럼 포도주가 아니라 맥주를 한잔 하면서 북 스페인의 여행을 정리해 보았다. 어떠했냐고? 또 다시 오고 싶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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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문인,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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