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각지서 성지순례객 몰려… 양측 “양보 못해”
▶ 최근 유네스코서 요르단쪽만 ‘세계문화유산’ 지정
요단강 동쪽 요르단 지역의 세례터에서 한 기독교 방문객이 다른 교인의 머리 위에 강물을 뿌리고 있다. 뒤쪽으로 이스라엘이 관할하는 까스르 엘 야후드에 순례자들이 모여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 요르단-이스라엘 측 서로 “여기다” 주장
성지순례에 나서는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을 이루는 요단강이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출발해 사해로 흘러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영구하천이다. 전장 251km인 이 강의 서쪽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경계가 놓여 있고 동쪽으로는 골란고원과 요르단이 자리 잡고 있다. 요르단과 가나안 땅을 나누는 자연적인 경계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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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은 성경의 구약과 신약 모두에 등장한다. 구약에 따르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민족은 40년간 광야생활을 거친 후 이 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순례객들이 요단강을 찾는 이유는 이곳에서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신약성서의 기록 때문이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 이른바 4복음서에 등장한다.
요르단과 이스라엘 정부 당국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 여겨지는 지점에 각기 세례에 필요한 시설물을 설치하고 관광객을 받아들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수미터에 불과하지만 서쪽의 ‘까스르 엘 야후드’ 세례터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속하고, 동쪽의 알마그타스 세례지는 요르단 관할이다.
당연히 둘 중 어느 쪽이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이냐는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주장만 있고 증거는 없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측의 논쟁은 지난 13일 유네스코가 요단강 동쪽 둑방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일단락됐다.
유네스코는 “대다수 기독교회들의 견해에 근거해 볼 때 이곳이 예수가 세례를 받았던 곳으로 믿어진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요르단 정부는 유네스코의 결정을 쌍수를 들고 반겼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이슬람 국가’(IS)의 발호로 관광객이 급감한 상황에서 유네스코의 발표는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반면 이스라엘 정부는 침묵을 지켰다. 엄밀히 말해 까스르 엘 야후드 세례터는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위치한다. 흔히 ‘웨스트뱅크’라 부르는 이곳은 1967년 중동전 당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밀어내고 수중에 넣은 3개 구역 가운데 하나다. 팔레스타인은 웨스트뱅크에 자체적인 독립국가를 세우고 싶어 한다.
독립국가 수립 이후의 상황을 염두에 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한 관리는 “까스르 엘 야후드가 알마그타스와 나란히 예수 세례터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어야 했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유네스코의 결정에 일부 고고학자들도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채플힐 소재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고고학자인 조디 마그네스는 “요단강 서쪽 제방이 예수의 세례터임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요르단 정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서를 검토한 전문가들 역시 아랍어로 세례를 뜻하는 알마그타스가 예수의 세례터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시인했다.
이들은 유네스코에 보낸 등재 추천서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그타스는 이곳을 성지로 여기는 대다수의 기독교회들에 대단히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요한복음 1장28절을 들춰보면 예수가 세례 받은 장소에 대한 짤막한 힌트가 등장한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가 그것이다.
켄터키주 아스베리 신학대학의 신약교수인 벤 위더링턴은 요단강 동쪽 제방이 요한의 세례터라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거들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유다 왕 헤롯을 비롯한 예루살렘 실력자들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강 건너편에 머물려 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추론이다.
이스라엘의 순례 전문가인 이스카 하라니도 “둘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공식 세례터로 인정하라는 신학적 결정이 내려진다면 나는 요단강 동쪽 장소를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라리는 그러나 ‘영적 사막’에서 ‘성지’로의 여행이라는 세례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 두 곳을 하나의 세례터로 등재했어야 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기독교단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 루터교회 등은 유네스코에 요르단쪽 세례터를 지지하는 편지를 띄웠다. 2000년 이후 3명의 교황이 알마그타스를 방문해 이곳을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 인정했다.
반면 그리스 정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은 두 곳 모두를 성지로 받아들인다.
그리스 정교회 예루살렘 대교구 대변인 이사 무슬레는 “동쪽에서 오는 신도들과 서쪽에서 오는 신도들이 강물 속에서 하나가 된다”며 두 곳 모두 신성한 장소라고 말했다.
관광객 수로 따지면 이스라엘 쪽이 훨씬 더 많다.
까스르 엘 야후드에는 매년 50만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몰리는데 비해 요르단 쪽 알마그타스는 수만명을 끌어 모은데 그친다. 다른 이유보다 성지순례 코스가 ‘하느님의 땅’인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짜여 지기 때문이다.
지난달 어느 날 아침, 요단강 서쪽 제방은 순례객들로 가득 찬 반면 동쪽 제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이날 순례자들은 대부분 우크라이나인들이었다. 수영복 위에 근처 기프트샵에서 8달러를 주고 구입한 흰색 가운을 걸친 방문객들은 물속으로 걸어들어 갔고 일부는 손으로 코를 쥔 채 탁한 물속으로 잠수했다.
경사진 제방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건너온 숭배자들이 둘러 앉아 통기타의 반주에 맞춰 ‘영광, 영광 할렐루야’를 찬송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미들버그에서 왔다는 요한 코넬리우스(47)는 “성서에 등장하는 세례터가 정확히 요단강 서쪽이건 동쪽이건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요단강에 오셨었다는 사실일 뿐”이라는 얘기다.
요단강의 세례터가 일반에 개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협정이 있기 전까지 이 지역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살풍경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종교적 축일이나 절기에 한해 순례자들의 웨스턴뱅크 접근을 허용했다. 까스르 알 야후드를 방문객들에게 완전히 개방하기 시작한 것은 인근의 지뢰를 제거하고 난 2011년부터였다. 그러나 이직도 주변에는 수천개의 지뢰가 매설돼 있다.
요르단은 2002년 알마그타스의 빗장을 열어젖혔다.
고고학적 증거가 없으니 알마그타스에서 정말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이곳에서 세례를 베풀기 위한 풀과 예배당, 수도승들이 기거하던 동굴 등의 유적이 발굴됐지만 유네스코 전문가들은 이들이 초대교회 이후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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