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천연희는 결혼하면서부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어야만 했다. 농장 노동자의 옷을 빨아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바느질도 하였다. 1919년에 길찬록이 파이아 농장에서 도급을 했는데, 천연희는 ‘곡상’ 으로 노동자들의 끼니를 준비하였다. 도급은 일정한 크기의 땅을 받아 사탕수수 경작을 책임지고, 수확한 양을 돈으로 환산하여 받는 일종의 소작농 제도였고, 도급을 받은 사람이 노동자를 고용하였다. 곡상은 영어의 cook을 일본인이 ‘곡’으로 발음하고 상(祥)을 부쳐 ‘곡상’ 즉 조리사라는 뜻으로 만든 말이며, 한인들도 이 말을 사용하였다. 천연희가 1922년 말 오아후의 와히아와로 와서 미군 상대의 양복점 겸 세탁소에서 군복을 만들고 세탁 일을 하였다. 또한 오후 3시에는 한인기독교회 부속 한글학교에서 일주일에 6일을 한글을 가르쳤다. 주중에는 석점 반 (세시 반)에서 다섯 점까지, 반주일 (토요일)에는 8시 반에서 오후 2시까지였다. 그야말로 ‘투잡’ (two jobs)의 연속이었다.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아이들을 교육 시켜야 한다는 다짐으로 견딜 수 있었다. 천연희는 아이들이 재주가 있으면, 대학 교육도 시킬 계획이었다. 길찬록과 이혼한 주된 원인이 아이들 교육이었다. 알코홀릭 길찬록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생계는 물론 아이들 교육을 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대성과 결혼 한 후 박대성이가 같이 일하는 사람과 싸움을 하고 일을 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호놀룰루 시내로 와서 일을 구하다가 다행이 와이알라에 클럽 소장 집의 조리사로 들어가게 되어서 월급도 받으면서 집도 주어서 돈을 조금 모을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박대성이가 일이 싫다고 그 집에서 나왔고, 그 후에는 일이 없어 조금 모은 돈을 다 써버렸다. 할 수 없이 천연희가 어느 집에서 바느질하고 아이들 봐주는 일을 하여 1 주일에 $10씩 벌었다.
얼마 후 박대성이가 군인들은 실어 나르는 택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박대성이는 운전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운전석 옆에 앉고 동업자 장석조가 운전을 하였다. 당시 미 전국에 금주령이 내려 있었는데 운전 중에 일본사람들이 만든 오콜레하우라는 하와이 술을 위법으로 팔았다. 천연희가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 순경에게 걸려서 경무청에 불려가게 되었는데, 겁이 나니까 천연희보고 가달라고 하여 천연희가 가서 ‘일을 간 남편 대신에 내가 왔다’하고 벌금만 내고 나왔다. 천연희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까지 돈을 벌 생각은 없었지만, 박대성이는 그런 것을 관계치 않았다. 박대성이가 조금 번 돈과 $100 짜리 계(契, 계장은 권도연)에서 받은 곗돈으로 알라케아 스트리트(Alakea Street) 1182 번지의 2 층 집을 백인 의사에게서 임대받아 하숙집 (여관)을 운영하였다. 원래 그 집 아래층에는 ‘비어’ (천연희는 맥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를 파는 면허가 있는 집이었다. 마침 공화당 후버 대통령이 금주령을 해제하였기 때문에 술을 팔 수 있었다. 그래서 아래층을 고치고 Park’s Court 이라고 하여 박대성이가 식당을 운영하게 만들어 주었다. 박대성이는 여직원과 싸움을 하는 등 못된 성격을 들어냈으나, 사업은 그럭저럭 잘 되었다. 그런데 주류면허가 만료되어 새로 받아야 하는데 박대성이는 그런 것에는 전혀 상관 않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천연희가 법률사에게 새 면허 신청을 부탁하고 온 사이에 박대성이가 검사 나온 (사복) 순경에게 비어를 팔아서 1년 주류 판매 금지를 받았다. 비어를 팔지 못하니까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음식점을 방으로 개조하여 여관으로 사용하였다. 천연희는 오전 11시 30분까지 방 청소를 끝내고,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는 파인애플 공장에서 일을 하는 등 다시 두 일하여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였다. 물론 딸들도 파인애플 공장에서 일하고 학비를 보탰다. (1920년대부터 파인애플공장은 학생은 물론 부인들도 손쉽게 이른바 ‘알바’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후에도 박대성이가 직업을 제대로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천연희는 될 수 있으면 박대성이가 할 일을 만들어 주었다. 한 때는 킹 스트리트에 있는 Civic Auditorium (시립 체육관)의 hot dog stand 를 이원순에게서 임대받아 운영했으나 박대성이가 제대로 운영을 못하고 손해만 보다가 1년 후에 팔고 1939년에는 곗돈을 받아 퍼트 스트리트 (Fort Street)에 방 30개가 되는 건물을 의사 양유찬에게서 임대받아 Standard Hotel을 운영하였으나 1년 후 계약에 문제가 생겨 1940년에 팔았다. 이름은 호텔이지만 하숙집이었다. 식구가 살 집을 빌리고, 곗돈을 갚고 나니까 수중에 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곗돈을 빌려 방 16개를 쪼개 만들 수 있는 건물을 사서 Castle Hotel 이라는 하숙집을 운영하였다. 이 때 44살의 천연희가 세 번째 남편 기븐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천연희는 한 번도 그가 남긴 기록에 길찬록과 박대성을 ‘남편’ 또는 ‘누구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이 꼭 이름을 썼는데, 기븐 만은 ‘남편’ 또는 ‘영감’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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