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엔 단체활동, 밤엔 표구작업 ‘팔순 노익장’
▶ 이민과 함께 뉴저지에 한국화랑 오픈 25년째 운영
2009년 8월 유엔에서 열린 뉴욕 세계미술대전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주옥근.
화가들이 즐겨 쓰는 빵떡모자를 눌러쓰고, 자주 찍히는 단체 사진에는 남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어 눈에 잘 띠는 사람. 걸을 때 휘청거리는 큰 키로, 궂은일에나 좋은 일에나 항상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드는 인심 좋은 할아버지. 다소 실속이 떨어지는 행동으로 비쳐질는지 모르지만 그는 진정한 한인사회 봉사자임에 틀림없다. 나이에 아랑곳없이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의 주인공 주옥근(79)은 뉴저지의 관문 포트리에 한인상가가 자리 잡기 시작하던 무렵, 1987년 이래 한국화랑 간판으로 포트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지난 주말 국악경연대회를 성대히 마친 미주한국국악진흥회장으로써 그의 소감은 일단 만족이었다. 31개 팀이 참가해 예년보다 수준 높은 경연을 펼칠 수 있었고, 메릴랜드, 워싱턴 DC, 버지니아 등 타주에서의 참가가 두드러져 성공적이었다. 또한 외국인이 우리 국악을 좋아한 나머지 자신이 양성한 국악인 10여명을 인솔해 참석한 예까지 들었다. 어려서부터 농악대를 따라다니던 흥을 살려 지난해부터 국악진흥회장을 맡게 된 그는 미술이나 국악이나 예술은 한통속이 아니냐며 한량 기질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그의 본업은 미술인으로, 한국화랑을 운영하고 있지만 여기저기 참여한 단체들이 많다. 뉴저지 대한체육회(전미체전 선수단장), 뉴욕한인회(부이사장 7년, 문화예술담당 부회장 2년), 뉴저지 한인상록회(7대, 8대 회장, 4년), 뉴저지 경제인총연합회 참여로 한국에서 열린 옥타와 한상대회에도 참가했다. 그 외에도 여러 단체를 섭렵하는 한인사회의 ‘마당발’로도 통한다.
“결국은 미술 쪽으로 돌아와야죠.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길 밖에 없고 지금까지는 한눈을 팔았던 거지요.” 미술인으로써 작품 활동 보다는 전시회라든지 행정 쪽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단체 참여가 많게 된 연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에서 대학교수라고 하면 학원을 운영하거나 상급학교 진학과 연관성이 있지만 뉴욕에 와보니 이중 잡을 갖지 않으면 헤어나기 힘들어요. 그러다보니 한인사회의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고 여기저기 참여하게 됐는데, 한국에서부터 관심분야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에요.”
미술활동의 일환인 화랑의 커스톰 프레임 작업을 그는 출가한 딸 상희와 함께 25년간 해왔다.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를 졸업,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딸은 외국인들을 맡고, 자신은 주로 동양화를 취급한다. 질이 좋아 수축성 높은 한지를 매일 만지며 표구를 하다보면 보람도 느끼게 된다. 한국 같으면 기술자를 두겠지만 여기서는 본인이 직접 챙겨야 되기 때문에 손수 망치를 들고 표구작업을 한다. 수많은 단체 활동으로 빼앗긴 시간을 충당하기 위해 늦은 저녁에도, 주말에도 그는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천직으로 알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싫증도 별로 나지 않는다.
돈 안 받고 그냥 해 주는 경우도 있다. 사실 그냥 해 주는 게 더 많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딸이 “80 노구에 젊은 사람들에게까지 봉사를 하느냐”고 핀잔을 주면 “기쁜 마음으로 남에게 주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대꾸한다. 실속은 없지만 그런 작업환경 속에서 건강을 얻는다고 그는 자신한다.
그의 미국 이민은 87년 4월. 불의에 순직한 큰아들을 대전 국립묘지에 묻고 실의에 빠졌을 때 처가 7남매가 모두 와 있는 미국에 장모님 초청으로 정식 이민을 했다. 포트리에 짐을 풀고는 근처에 혹시 화랑이 있는지를 탐색했다. 한국서 화랑 운영 경험이 있었고, 이삿짐으로 가지고 온 것이 그림뿐이던 차에 1주일도 안 돼 알맞는 화랑 자리를 메인 스트릿에서 찾았다. 오픈 무렵 부근에 한인 업소들이 너댓군데 있었다. 사진 DP집, 민속촌 식당. 88식품, 삼복식품 등이 있었고 앤더슨 애비뉴에 서병조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세 들어 살고 있었고, 지상사 요원들이 제법 많았다.
조지 워싱턴 브리지 부근 8층 건물에 현대종합상사가 있었고, 상인들을 주축으로 포트리실업인번영회가 90년 설립됐다. 한국화랑은 오픈 기념으로 원로 심명보 화백의 전시회를 열었고 표구와 작품 판매도 병행했다. 본격적인 갤러리 활동을 위해 그는 ‘한미문화원’을 92년 11월에 설립해(170 메인 스트릿) 동포화가 및 모국 화가들의 전시회를 주최했다. 국전 심사위원 김영근, 풍속화가 이서지, 청사 이동식, 우남 이옥성, 동국대 미술대를 창립한 전영화, 안봉규, 오세영, 한규남-최분자 부부, 한봉덕 원로 화백도 거쳐 갔다. AWCA 창립시기 기금 마련 전시회, 럿거스대 한국학과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도 이곳서 열렸다.
그러나 갤러리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3년 후 농협 건물이 리모인 애비뉴에 들어서면서 그리로 이전했으나 농협이 2년 후 문을 닫는 바람에 때마침 릿지필드에 진출한 한아름 마트로 옮겨 갔고 그곳서도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메인 스트릿-농협-한아름 등을 전전하며 풍상을 겪는 가운데에도 총 120여회의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문화원은 몇 년을 쉬다가 지난해 파인플라자 2층에 둥지를 틀면서 이제는 미술관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뉴욕일원에 동포 미술인들은 많이 있지만 서로 바쁘다보니 협회를 출범시키지 못하던 시기에 회원 32명의 명단을 들고 한국미술협회를 찾아가 정관 개정을 이끌어 2005년 7월15일 뉴욕지부 인준을 받은 것도 주옥근의 공이었다. 지부 운영에 문제가 생겨 유명무실해지면 으레 그가 회장을 다시 맡아 명맥이라도 유지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단체를 이끄는 데에는 그만큼 봉사정신과 자기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새삼 확인한다.
젊은 시절 그는 홍익대 미대에 다니면서 영화사에 들어가 영화미술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50년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이 무대가 되었던 영화 ‘피아골’ 촬영 팀에 합류해 배우 허장강 등과 밤샘 작업을 했고, 김지미의 첫 출연 영화에 미술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동원영화사를 설립. ‘청사초롱’ 하나 찍고 파산했던 쓰라린 경험도 있다. 그의 사무실 벽엔 영화사 시절 빛바랜 사진들이 결려있다. 한량 기질을 접고 한때 서울지방 검찰청 동부지청 강남구 청소년 선도위원이 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불량 청소년들을 선도하는데 성공한 케이스도 있었다. 그때 받았던 감사패도 사무실 벽에 걸려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현재 아콜라감리교회를 섬기고 있다. 친동생 주남철이 부산 기장에서 목사로, 사위 방봉균 목사가 현재 플러싱 열방선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가족으론 부인 주민자와의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준용은 ‘아이러브 코리아’ 부사장으로 있고, 딸 상희는 20년째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남편의 충실한 내조자이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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