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세대 리더로 열심 다해...이젠 2세들이 이어받아야”
▶ 낮에 CPA로 밤엔 로스쿨 다니며 누구보다 바쁜 30대 보내
은사와 함께 … 왼쪽부터 민대기,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정성화 연대 뉴욕동창회장
10여년간 한인회 이사.지역 플래닝보드 멤버로 24년간 활동
후배 변호사들에 크던 작던 커뮤니티에 참여할 것 당부
몇 년 전 뉴욕한인변호사협회 연말 디너파티에서 커뮤니티 서비스 상을 받은 민대기 변호사는 짧은 스피치에서 “우리 1세들은 한국에서 교육도 많이 받았고 스마트하지만 미국에 이민 와서 영어를 잘 못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스몰 비즈니스밖에 할 수 없었다.
세탁소, 청과물 가게로 먹고 살았다. 그런 가운데 위대한 코리안 아메리칸 비전이라는 게 생겼다. 당신들과 같은 1,5세와 2세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 했고, 졸업 후 자신이 선택한 필드에서 일하면서 이 트렌드가 계속된다면 미국 주류사회를 움직이는 인재가 분명히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1세 한인사회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변호사인 당신들의 어드바이스와 카운슬링이 필요하다. 당신들은 직접 간접으로, 크던 작던 커뮤니티에 참여하라. 그래서 1세사회가 계속해서 코리안 아메리칸 비전을 성숙하게 키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가 연단에서 내려온 후 예기치 않은 현상이 나타났다. 젊은 후배들이 두세 명씩 저녁 내내 그를 찾아와 스피치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족히 30명은 넘었다. 중국인 판사까지도 스피치에 감동했다. 이건 한인커뮤니티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아시안 커뮤니티 전체의 이야기라고 했다. 그와 같은 반응에 접한 민변호사는 우리가 그런 의식을 갖고 어떤 기회에 무슨 일을 한다면 엄청난 잠재력으로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변호사 겸 CPA로서 30여년 뉴욕, 뉴저지 한인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대기.
통산 5년간의 초창기 CPA 경험이 그의 변호사 업무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했다. 재무제표 같은 것을 쉽게 읽을 수 있고, 내부 통제기능이라든지 CPA들만이 볼 수 있는 내용들에 대해 빠삭하기 때문이다. 한인으로 미 동부에서 제일 먼저 세법을 했기 때문에 그때 얻은 택스 상식을 가지고 프랙티스를 할 때 엄청난 백그라운드의 힘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일도 열심히 했다. 30대에 우리 동포들 중에서 일하느라 밤을 제일 많이 지새운 사람 손들라고 한다면 단연 등수 안에 들어갈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한인사회를 미 주류사회와 가깝게 하는 역할을 자임하면서 뉴욕한인회 이사직을 10년 이상 맡았다. 변호사협회 9대 회장으로 94년부터 2년간 당시 플러싱 고등학교 강당에서 무료 법률상담 사업도 벌였다. 또 경제인협회, 수산인협회, 청과협회, 봉제협회 등 여러 직능단체의 고문변호사로도 봉사했다. 요즘은 2005년 이래 평통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사회에도 참여했다. 뉴저지 잉글우드클립스에 그가 이사 왔을 때 프리시 시장이 찾아와 타운 거주 30% 동양인의 대표로 공천을 줄 테니까 시의원에 출마를 하라며 부추겼다. 막 개업한 변호사 일에 지장이 많다는 이유로 고사했더니 그러면 상징적으로 플래닝 보드에 인벌브하라고 종용하는 바람에 이를 뿌리치지 못해 플래닝보드 멤버로 24년간 활동하다 최근에야 사직했다.
요즘은 뉴저지 사무실을 주로 사용하면서 폭넓은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변호사는 정년이 없죠. 정신이 똑바른 한, 또 나를 보겠다는 사람이 있는 한.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한국계 회사들이 미국에 엄청나게 진출하고 있어요. 이미 M&A를 통해서 진출을 했고, 앞으로 좀 더 활발해질 것 같습니다. CPA 회사에서 M&A를 전문으로 했기 때문에 앞으로 그 경험을 살려 할 일이 있을 듯 합니다.”
대전고, 연세대 정외과 졸업 후 그는 1971년 유학생으로 뉴욕에 왔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MBA 코스를 2년 만에 끝내고 73년 훠스트 내셔널 시티뱅크(현 시티뱅크)에 취직, 서울지점에서 2년 동안 영업과장과 심사과장을 지냈다. 그사이 컬럼비아대에 다니면서 교제하던 패션 디자이너 이지숙이 따라 나와 서울에서 약혼을 한 다음 다시 1975년 뉴욕으로 정식 이민을 했다.
새 출발하는 마당에 라이슨즈가 있는 직업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공인회계사(CPA) 자격증을 취득, 당시 빅8에 속하는 딜로이트 앤드 해스킨스에 들어갔다. 그 시절 CPA 회사에 입사만 해도 한인사회에서 알아주던 때였다. 당시 한인 CPA로 권혁달, 신영수, 크리스 박(박성일), 정일화, 한무광, 조태환 등 10명이 채 안됐다. 그는 이후 5년간 아더 영(현 어네스트 영), 쿠퍼스 라이브랜드(현 PWC) 등으로 옮겨 다니며 경험을 더 쌓았다. 그러나 회계 감사를 해 보니까 평생 할일이 못되고 취향이 아니라는 점을 파악하고는 법률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낮에는 PWC의 뉴욕 오피스에서 택스 매니저로 일하면서 야간 로스쿨을 다니던 이 무렵이 그의 일생 중 가장 바빴던 시절이었다. 밤새우며 공부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 있던 그였다.
80년 포댐 로스쿨에 들어가 84년 5월에 졸업하면서 뉴저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뉴욕주 시험은 다음해 2월에 합격했다. 이 소식이 한국신문 본지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한인 변호사가 드물었던 시절, 뉴욕에서 활동하던 한인 변호사로는 손창문, 이동호, 김재현, 김정원, 한석종, 정진우, 현영희 등 열손가락 안에 잡힐 정도였다. 변호사 수는 적고 교포사회가 자리 잡아 가면서 성장하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그 수요가 상당히 많았다. 가게 사고팔고, 집들도 사던 때였다. 또 한국으로부터 종합상사들이 본격 진출하던 때여서 대우, 효성, 현대 종합상사 일도 했고 한국계 상업은행(현 우리아메리카은행) 사외이사로 임명돼 23년 동안 일했다.
컬럼비아대학원 시절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처형 이성숙을 통해 만난 부인 이지희는 FIT를 나온 패션 디자이너로 이브닝 가운을 주로 만들었고 프리랜서 시절엔 미씨 주니어 쪽 제품을 많이 했다. 자녀는 1남1녀로, 아들 민대일은 카네기멜론 공대를 나와 패션회사 코치(Coach)의 아시아 담당 매니저로 있고, 딸 태미는 마케팅 컨설팅 회사 다니다 결혼 해 지금은 전업주부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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