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부부싸움을 벌이는 부부의 경우 둘 모두, 혹은 어느 한쪽에 인지장애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80줄의 노부부인 조지와 그레이시는 65년 이상 동고동락한 사이다.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함께 걸어온 여느‘평생 반려자’들과 마찬가지로 둘 사이의 관계는 푸근하고, 따듯했다. 그러나 얼마 전 그레이시가 입원을 하고 조지가 낙상을 입은 이후 노부부 간의 말다툼이 부쩍 잦아졌다. 평소 부부싸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서로를 향해 마구잡이로 쏟아낸 막말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위가 높았고, 표현도 거칠었다. 심한 말다툼을 벌일 때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70년 가까이 곁을 지켜준 상대의 가슴에 더 깊은 상처를 낼 수 있을지 평생 연구해온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치매의 가벼운 전조로 편집증·분노·우울증 등 동반
멀쩡했다-도졌다 반복해 조기에 알아채기 힘들어
당뇨병 등 만성질환 스트레스도 부부 다툼의 원인
이런 종류의 퇴행적 부부관계는 지극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노인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전문가들은 이 경우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NORC/시카고대학 노화연구소 디렉터인 린다 웨이트는 부부 간의 다툼이 평생 지속되어 온 행태의 연속인지 아니면 새로운 변화인지부터 알아볼 것을 권한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부부싸움과 말다툼도 ‘결혼 스타일’의 한 부분일 수 있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서로 잡아먹기라도 할 듯 싸움을 해대면서도 멀쩡하게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
메릴랜드대학 상담심리학 명예교수인 낸시 K. 슐로스버그 박사는 “싸움을 즐기는 노부부는 아드레날린 분비형 관계에 길들여진 커플”이라고 설명했다.
시카고대 노인병 담당 과장인 윌리엄 데일 박사에 따르면 노인 부부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가장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제3자, 혹은 외부인이다.
데일 박사는 “전에 찾아뵈었을 때보다 노친네들이 말싸움을 심하게 하는 것 같다 싶으면 일단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노인 커플의 부부싸움은 대부분 감정적인 이유, 혹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다.
노인이 평소보다 화를 잘 내고 싸움을 자주한다면 이는 치매나 알츠하이머의 전조인 온건한 인지장애(MCI)의 첫 번째 신호일 수 있다. 인지장애의 신호는 기억력과 추상적 사고기능의 저하보다 분노, 초조감, 우울증 등 감정적 변화의 형태로 더욱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인지기능 저하의 조기신호는 대단히 미묘하기 때문에 배우자들이나 장성한 자녀들조차 알아채기 힘들다.
나이든 배우자가 평소 즐기던 활동을 꺼리는 것도 MCI의 확실한 신호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활동적이던 남편이 언제부터인지 사교모임이나 가족모임을 기피하기 시작하자 아내도 어느 결엔가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모임 참석 여부를 두고 부부 사이에 종종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 때마다 아내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고집불통 영감탱이”로 남편을 몰아세웠다.
평생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온 아내는 남편이 자신에게 나타난 MCI 증세에 잔뜩 위축된 상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모임에 나온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편은 엄청난 심리적 위축감에 사로잡혔지만 아내는 “영감탱이가 변한 이유”를 나이든 사람의 “나태와 쓸데없는 고집”에서 찾으려 들었다.
MCI의 또 다른 신호로는 의부증이나 의처증, 편집증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도 비일비재하다.
암 환자인 한 70대 여성이 어느 날 몹시 격앙된 어조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항암치료를 받는 병원 문 앞에 자신을 내려준 남편이 주차를 하러 간 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여성은 남편이 인지장애로 시간 감각과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너희 아버지는 이제 나한테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런가하면 “시장을 보러간 남편이 밖에서 딴 짓을 한다”는 근거 없는 의심으로 결혼생활을 생지옥으로 밀어 넣은 70대 여성의 사례도 보고됐다. 남편은 80대 초반이었다.
MCI를 조기에 간파하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증상들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멀쩡해졌다 다시 도졌다 하기 때문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데일 박사에 따르면 55세를 넘긴 남성 10명 가운데 1명, 여성 6명 가운데 한 명은 죽기 전 어느 시기엔가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한편 캐나다 의학협회 저널에 게재된 논문은 신체질환을 노부부들의 관계를 깨뜨리는 주범으로 지목했다.
병든 남성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분노하고, 여성 배우자는 예전과 달라진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겁을 집어 먹는다.
이 논문의 저자는 당뇨병, 관절염과 심장병을 부부관계에 강력하고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질병으로 제시했다. 이 가운데 특히 당뇨병은 우울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잦은 고약스런 만성질환이다.
신체 질환은 커플의 성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줌으로써 부부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예들 들어 당뇨병은 신경장애를 초래하기 때문에 환자는 신체 접촉에 흥미를 잃는 등 성적 자극에 둔감해진다.
나이를 불문하고 신체적 애정 표현이 사라지면 부부 사이의 긴장감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이제까지 나온 조사 결과는 성생활에 문제가 있는 부부가 싸움을 자주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대로 싸움을 잘하는 부부가 성생활에 문제가 많다는 통설도 과학적으로 입증이 됐다.
은퇴, 역할 변화, 자율권 상실, 건강과 능력 면에서 배우자와의 격차도 부부싸움을 불러오는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개중에는 배우자를 제압하기 위해 부부싸움을 벌이는 철없는 노인들도 더러 있다. 싸움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힘을 확보하려는 발상이지만 이런 식으로 손에 넣은 ‘배우자 권력’은 가짜다.
장기 간병을 필요로 하는 만성 질환은 관계를 파괴하는 확실한 요인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들 하지만 ‘열부·열녀’도 없다. 배우자 병수발을 담당하는 남편이나 아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배우자를 향한 짜증과 분노의 감점이 고개를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보면 죄책감이 뒤따르게 되고, 거기서 다시 좌절감과 분노감의 확대 재생산이 시작된다.
뒤돌아보면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변함없이 배우자를 사랑하겠다는 결혼서약은 무담보 약속어음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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