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들과 가장 어울렸던 ‘소통외교의 선구자’
제2회 코리안 퍼레이드의 선두. 왼쪽부터 김재택교수, 김세진 총영사, 카치 뉴욕시장, 한사람 건너 박지원 한인회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가장 먼저 창설된 해외 공관 중의 하나인 뉴욕총영사관은 1949년 4월1일 업무를 시작했다. 금년으로 62년을 넘기면서 모두 21명의 총영사들이 거쳐 갔다. 현재의 김영목 대사는 22대 총영사다. 기록상으로 최장수 총영사는 창설로부터 4.19가 나기까지 12년을 봉직한 초대 남궁염이 단연
으뜸이었고 한인사회의 인기도 면에서는 아마도 김세진을 능가하는 이가 없을듯 하다. 인기투표를 공식으로 한 적이 없으니까 그 척도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겠지만 임기 당시의 단체장들로부터 나온 의견을 취합한다면 아직까지 뉴욕 한인사회에 김세진만큼 친근감있는 총영사는 없었다.
김세진은 특유의 사교성과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관료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았고 학자풍의 선명한 이미지가 한인사회에 그대로 부각됐다. 그의 임기는 정확히 1980년12월부터 84년3월까지 만 3년3개월이었으나 7년간의 유학생활, 13년간의 대학교수 생활을 합치면 20년에 걸친 미국생활이었다. 그 기간을 통해 얻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미국인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실속 있는 일선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당시 뉴욕에서 발행되던 외교 전문잡지 ‘디플로매틱 월드 뷸리틴’의 1983년 3월26일자에는 2페이지에 걸쳐 그에 대한 기사로 넘친다. 뉴욕영사단장으로 선출된 그는 주정부, 시정부와 유대를 강화하는데 역점을 둘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뉴욕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인사말을 통해 “미국내에서 한국의 이미지는 구겨져 있다”고 전제, “한국이 후진국으로 소개되고 옛날의 한국으로 알려진 게 사실이나 현재의 한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과의 무역관계를 볼 때 거래량이 전세계에서 9번째로 규모가 큰 120억달러에 달하고 있다”고 소개, 한국을 보는 눈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은 향후 5년간 고도의 기술산업과 자본집약 산업의 조화로 세계무역의 주요 국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주장.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연설 내용은 크게 틀리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 한국이 주요 무역국가로 발돋움했다. 대미 통상문제에 대한 일가견을 인정받아 그는 곧 상공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뉴욕을 떠나기 전 단체장들이 마련한 환송연에서 그가 한 말이 있었다. 미국에 민주당 정부가 서게 될 때를 예측해서 학자적인 관점에서 대미외교의 청사진을 거의 마칠 무렵인데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상공부 차관으로 임명된데 대해 “무슨 일들을 그렇게 하지?”라며 일관성 없는 인사정책에 대해 푸념하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갑자기 귀국한 직후 바쁜 일정 속에서 몸의 이상을 느꼈다. 췌장암으로 진단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51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를 아끼던 사람들에게 더한 아쉬움을 주고 갔는지도 모른다.
80년 뉴욕총영사 취임 직후 그는 전임자들과 달리 동포들의 고된 이민생활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헌츠포인트 새벽시장을 방문, 청과업자들의 노고를 달래주었고 다운타운 풀턴스트릿 수산시장도 방문해 동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때까지 관료적이고 다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해오던 총영사관의 면모를 바꿔놓았다. 3.1절, 8.15 광복절 기념식에나 참석하던 총영사의 관행을 깨고 되도록 많은 행사에 참석했다. 단체들의 연말파티나 동창회 등 일반행사에도 일정을 소화해 동포들과 대화를 나누는 총영사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부인 김혜선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뉴욕총영사 임기는 동포들과 아주 잘 어울려 지낸 기간이었다고 했다. 행사마다 찾아다녔고 그때마다 누구와도 잘 어울렸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의 임기말 뉴욕 한인회관 마련에 공관장으로서 최선을 다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강익조 한인회장이 연임을 하면서 어렵사리 마련한 한인회관의 마지막 클로징 단계에서 한국계 은행들이 융자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김세진이 개인보증을 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서 성사된 일이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김세진은 오래된 뉴욕한인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공무원으로 기억되는지 모른다. 공무원으로서의 김세진에 앞서 인간 김세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학력인 그의 경력을 따라가 보는 것이 도움이 될듯하다.
1933년 평양 출생인 그는 서울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본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전쟁 중 군의관으로 가면 위험률이 줄어들 것이라는 부친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1955년 사우스 웨스턴 대학으로부터 시작된 미국유학 기간 정치철학으로 전공이 바뀌었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그로서는 신학이 목표였지만 그 중간단계로 정치철학을 전공으로 삼았다. 주립 매서추세츠 대학원에서 정치학으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치는 동안 친우 이영호(전 체육부장관)의 중매로 김혜선과 결혼, 신혼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부자집 자제 행세를 할 수 없었다.
부친 김항복이 그당시 독립문표 메리야스를 생산하는 평안섬유의 사장이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근검절약을 당부하는 부친의 뜻에 따라 집에서 학비를 갖다 쓰지 못하고 장학금을 타거나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쓰는 자립정신을 키우고 있었다. 학위를 마치고 이스턴 켄터키대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지낸 후 노스 캐롤라이나대 연구 초빙교수를 거쳐 노스캐롤라이나 센트럴대 정치학 과장으로 부임한 그는 6년간 그곳서 지내면서 인근 동포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채플힐과 더햄 사이에 있는 조그만 대학에 있는 동안 김세진 부부는 나원용 목사를 중심으로 설립된 한인교회를 통해 동포들과 만났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한 김세진은 교회가 끝나면 으례 몇명씩 교인들을 집으로 데려와 밤늦도록 어울리며 국수를 삶아먹곤 했다는 부인의 회고담이다.
그의 한국 경력은 고려대 풀브라이트 연구교수, 평화통일 연구소장,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등을 역임했으며 외무부 본부대사가 마지막 경력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한 부인 김혜선은 연세대 음대 초빙교수를 끝으로 서울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으며 컬럼비아대 출신의 큰 아들 준기과 조지타운대 출신의 둘째 아들 준희가 있다.
조종무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