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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인이야기/ 학자-커뮤니티 리더 고광림


입력일자: 2011-10-06 (목)  
뉴저지 럿거스 주립대 유학생으로 시작된 고광림의 미국 생활은 박사학위를 받은 보스턴에 이어 제2공화국 시기 주미대사관 공사 시절의 워싱턴과 마지막으로 정착한 커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구분된다.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공사자리에서 물러난 그가 예일대 방문학자로 1961년 뉴헤이븐에 둥지를 틀었을 때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호프스트라 대학에서 괜찮은 제의가 왔다. 어소시에이트 프로페서, 부교수 자리가 난 것이었다. 예일대에 큰 기대를 걸고 왔던 그인지라 뉴헤이븐을 당장 뜰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호프스트라의 제의도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는지라 그는 큰 결심을 한 끝에 주 3일 뉴욕통근을 감행했다. 예일대에는 주 하루만 나가고 월, 수, 금 3일은 새벽 2시에 일어나 몬트리올발 뉴욕행 3시 틍근열차에 몸을 실었다.

맨하탄 42가 그랜드센트럴역에 내린 그는 지하철을 타고 34가 7애비뉴 펜실베니아역으로 이동해 그곳서 롱아일랜드행 통근열차를 갈아타고 헴스테드에 내려 버스편으로 호프스트라 대학에 도착하면 아침 8시가 되었다. 무려 5시간이나 걸리는 기차여행을 하고나서 9시 강의에 임하곤 했다. 낮 12시까지 꼬박 계속되는 강의를 끝내고 다시 온 길을 되돌아오면 저녁나절에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죽을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기차 안에서는 강의 준비를 하거나 지쳐 쓰러져 잠이 들면 승무원이 깨워주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그는 4년이나 계속했다. 호프스트라에서의 부교수 4년은 그에게 있어 의미있는 기간이었
다. 그전까지는 방문학자나 연구조교로서의 강의에 머물렀기 때문에 호프스트라는 그에게 있어 학문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1966년 센트럴 커네티컷 주립대에 안정된 교수 자리가 주어지면서 그가 타계한 1989년까지 종신교수로 있을 수 있었다. 그가 강의한 과목들은 국제법으로부터 시작해 국제기구론, 극동정부론, 중앙아시아 및 동아시아 제국 정치사, 중국정부론, 한국정부론, 일본정부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미국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학계에 몸담았던 그에게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가는 곳마다 한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는데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그가 뉴저지 럿거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하버드 법대 장학생으로 입학하기 위해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에는 한인이 11명쯤 있었다.

하버드 건축과에 다니던 조자용(전 에일레미술관장), 하버드대 사회관계학과에 다니던 최기일, MIT를 나와 사업을 하던 호머김, 하와이에서 건너온 박관두 할아버지 등이 있었고 다음해에 서두수, 유진오, 김두헌, 김중한 등 국내 유명학자들이 하버드 연구교수로 오게되자 조그맣던 보스턴의 한인 커뮤니티는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 가정이 있는 집을 돌아가며 모이다가 1952년 보스턴한인회를 만들었다. 초대 회장에 서두수, 부회장에 고광림이 선출되었고 이듬해엔 연희전문 박대선이 유입되자 한인교회를 설립했다. 해방후 초기 보스턴 한인 커뮤니티는 이렇게 형성되었다. 이무렵 한국은 전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외롭게 지내던 이들의 연대감은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하버드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고광림은 1955년 보스턴 한인회장이 되자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노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취했다. 정치학도로서 해외에서 애국애족하는 방법은 바른 소리를 내야 한다는 신념에서 그는 정치적인 궤를 뉴욕의 임창영(전 유엔대사)과 같이 했다. 독재를 비판하던 국내의 야당과는 관계없이 외롭게 해외에서 투쟁하던 시절이 그에게 있었다. 이때의 경력이 인정되어 4.19 직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부의 주미대사관 공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시기 임창영도 유엔대사에 임명되었는데 임창영은 고광림에게 있어 미국유학을 주선해준 고마운 사이였다.

뉴헤이븐에 정착한 후 고광림 부부는 예일대에 있던 장성은-폴린장(김규식의 딸) 부부, 이홍구(전 국무총리) 등과 가끔 어울리기도 했고 이스트락(동암) 인스티튜트라는 연구기관을 설립해 2세교육과 한국문화의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이들 부부는 처음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었으나 귀국길을 막는 요인들이 겹쳐 일어났다. 가장 큰 요인은 전쟁이었고 결혼에 이어 줄줄이 태어난 2세들의 양육문제 등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장녀 경신으로 부터 막내아들 정주에 이르기까지 한살 내지 세살 터울로 고만고만한 6남매가 차례로 태어나 대식구를 거느리게 되었다.

두 부부의 각별한 사랑 속에 자라난 6남매는 모두 하버드대를 거친 우수한 인재로 장성해 현재 미 주류사회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에 의해 고광림-전혜성 부부는 미국내에서 자녀교육을 가장 성공적으로 잘 시킨 부모로서 칭송을 받고있다. 자녀들의 현주소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장녀 경신은 한국 중앙대 자연과학대 학장으로 은퇴했고 장남 경주(하워드)는 미연방 보건후생부 차관보, 차남 동주(에드워드)는 매사추세츠에서 마취과 의사생활, 3남 홍주(해롤드)는 국무차관과 예일대 법대학장을 역임한 후 현재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무장관의 법률고문, 차녀 경은(진)은 예일대 법대 석좌교수, 4남 정주(리처드)는 보스턴에서 미술가로 활약 중이다.

고광림은 평소 그가 존경했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이름을 따 미국 이름을 아놀드 고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한국이름을 우선 지어준 다음 친구들이 부르기 쉽게 미국 이름 하나씩을 지어주면서 마지막 스펠을 D자로 항렬을 붙였다. 아놀드의 아들로 하워드, 에드워드, 해롤드, 리처드 등이 탄생한 셈이다. 고박사가 지난 1989년 9월 타계한 후 전혜성은 부부가 설립한 이스트락 인스티튜트 일로 한동안 바쁘게 지냈다. 미국에서 자녀교육에 성공한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돼 상복도 많았고 세계 여러 곳을 누비며 자녀교육에 관한 강의도 했다. 최근엔 크리스토퍼 박 등 젊은 후계들에게 인스티튜트의 일선을 맡기고 자신은 이사장으로 물러나 앉았다. 금년 82세를 맞아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 1986년 뉴헤이븐 자택으로 고광림 부부를 방문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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