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말 서툴렀지만 어려운 한인들엔 든든한 지원군
▶ 하와이 이민2세로 60년 뉴욕서 개업
아파트에서 열린 1970년 4월의 한인회 월례회. 의자에 앉은 사람이 남병학.
하와이 이민2세로 60년 뉴욕서 개업
현재 뉴욕일원에는 약 1만명 정도의 한인 변호사들이 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매년 2월과 7월 두차례에 걸쳐 300명에 가까운 한인 변호사들이 양산된다. 이대로 가면 변호사가 넘쳐흐를 정도로 포화상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변호사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진출 할수 있는 분야가 상당히 넓기 때문이다.
한국식 사고로는 변호사는 로펌에 가거나 판검사가 되어야 하는 직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변호사들이 갈수 있는 직장이 의외로 많다. 연방 정부의 각 분야, 정치인들의 대부분이
법률공부를 한 사람들이고, 각종 기업체, 교육부문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법적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바통을 넘긴 31대 뉴욕한인회에서도 1,5세, 2세들의 젊은 변호사 그룹이 참여해 열심
히 일한 흔적을 남겼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참석자 1,000여명이 넘는 펀드 레이징 파티를 두차례에 걸쳐 무난히 치렀다는 평가를 받았고 법률위원회와 의료분과위원회가 무료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참여가 돋보였던 2세 그룹은 찰스윤(윤명식)을 비롯, 이재성, 김수현, 김광수, 존 김, 이화경, 김정호, 이균 등 변호사들이 이끌었다. 32대 뉴욕한인회에도 그런 추세가 지속될런지는 미지수이지만 2세들의 한인사회 참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변호사 출신의 단체장이 눈에 잘 띠지 않지만 한인들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던 70년대만 하더라도 변호사 출신 한인회장이 더러 있었다. 당시 뉴욕에는 한인 변호사가 다섯 손가락으로 셀만큼 있었다. 나이가 지긋했던 케네스 남(남병학)이 60년대부터 활동하던 유일한 한인 변호사로서 제9대 뉴욕한인회장을 지냈고 73년 뉴욕에 둥지를 튼 김정원 변호사가 제12대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된 기록을 갖고 있다. 이듬해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미8군 법무관 출신 김재현 변호사가 뉴욕에 정착, 한인사회가 양분됐던 76년 한인연합회장으로 재임했다. 이들 모두 뉴욕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한때 한인사회의 리더 역할을 했던 법조인들이다.
하와이 이민 2세로서 지금은 한인사회에서 거의 잊혀진 뉴욕최초의 한인 변호사 남병학은 남다른 인생을 살았다. 사탕수수밭 노동이민인 부친(남신명)과 사진신부 출신의 어머니(김순희) 사이에 태어난 1918년생으로 하와이섬 힐로 농장에서 자라면서 주말에는 기독학원에 나가 종아리를 맞으며 한글을 배웠다. 힐로고등학교 졸업후 호놀룰루로 나가 경찰에 입문했다. 정규시험을 치루고 소정의 훈련과정을 거쳐 4년간 경찰관으로 근무할 때 키가 훤칠하게 컸기 때문에 제복이 잘 어울렸다. 1948년 누이동생이 다니던 뉴욕대학에 입학, 30세에 본토행을 이루었다. 이미 결혼한 몸으로 처와 딸을 두었으므로 보험회사 에이전트로 돈을 벌면서 야간대학을 다녀 10년만에 겨우 법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1957년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 최초의 한인 변호사가 되었으나 당시 뉴욕한인사회와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커뮤니티 형성도 안돼 있었고 정부기관, 유학생, 국제결혼한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1960년 그리스계 변호사와 손을 잡고 본격적인 변호사 활동 시작했을 때 한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주로 주한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이었다. 낯설은 이국땅에서 이혼당하는 여인들이 상당수 눈에 띠었다. 그들은 생활력은 강했으나 남편, 시댁 식구들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다가 파경을 맞아 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그는 국제결혼한 한국여성들에 대한 지론을 하나 갖고 있었다. 생활의 주도권을 쥔 여성들은 문제가 거의 없는데 비해 경제권을 남편에게 빼앗긴 여인들은 결국 파경을 맞게 되더라는 것.
남병학은 한국말이 서툴었지만 가난하고 언어소통이 어려운 동포들의 궂은일에는 팔을 걷고 나섰다. 68년 브루클린 부두에 미국적 상선 알젠틴호가 6개월간이나 발이 묶여 있었는데 선주가 파산을 하고 행방불명이 된 사건이었다. 이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인 선원 27명이 끼니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남병학이 무보수로 법적 투쟁을 벌인 결과 선주도 찾아내고 한국선원들을 무사히 귀국시킨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여유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무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교회 등기를 무료로 해달라는 한인목사와 다툼을 벌였고 한인회장 시절 뉴욕총영사관과의 사이도 평탄치 못했다.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임기 중 3.1절 행사를 별도로 거행했다. 한인회 경비를 줄이기 위해 월례회 장소를 회장, 부회장, 이사들의 자택을 옮겨 다니며 사용했다.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임기내 계속했다고 한다.
한국 유학생들의 지나친 일류의식에 일침을 놓았고 유학생회장 선거에 경기고, 서울고 출신들의 분파행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타협을 모르는 성격 때문에 비판에 직면한 적도 많았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 한인회장, 미국인이 어떻게 한인회장을 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었다. 1974년 공직을 버리고 하와이로 돌아간 남병학은 그곳에서 평화스런 노년을 보내고 있었
다. 지난 1985년 필자가 힐로의 남병학을 찾았을 때 그는 손수 지은 목조건물에서 부인과 함께 전원생활에 파묻혀 있었다. 그가 재배한 파인애플, 오렌지, 능금, 배 등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힐로의 레스토랑에 갔을 때 많은 이들이 남병학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하와이로 돌아간 그가 변호사 생활을 계속하다가 한때 지방검찰청 검사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맡았던 사건의 판결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그가 법정에서 판사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해서 법정 모욕죄로 하루동안 구금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와같이 흔치 않은 일로 연일 신문과 TV에 보도되어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나서 훨씬 후에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은 1999년이었다.
남병학이 뉴욕에서 은퇴하면서 뒤를 이은 사람은 손창문 변호사였다. 한때 여성봉사단체를 열심히 후원했던 손변호사 역시 요즘에는 맨하탄에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손변호사 다음으로 이동호, 홍성육 변호사 등이 한인사회에 등장했고 80년대 접어들어 김광호, 민대기, 조대영, 현영희 변호사 그리고 소장파로서 한석종, 이강국, 정진우 변호사 등이 한인사회에서 활동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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