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맨하탄 업타운’→ 60년대 ‘플러싱’
초기 유학생.노동자들, 뉴욕한인교회.인턴내셔널 하우스서 기숙
60년대 중반부퍼 플러싱 이민자들 정착지로 부상
한인교회.7번전철.종합병원 등 한인밀집지역 형성 큰 영향
해방전 유학생들에게 인기 높았던 인터내셔널 하우스
최장수 플러싱 거주자 윤해선 씨
해방 전 20-30년대 뉴욕에는 세 부류의 한인들이 주로 맨하탄에 살고 있었다. 첫째는 일본에 합병된 조국을 떠나 중국이나 유럽을 거쳐 망명 성 미국유학의 길에 오른 학생들. 당시 이들을 신도학생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가운데 운 좋은 학생들은 컬럼비아대학, 뉴욕대학 등에 입학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500 리버사이드 드라이브(170가)에 소재한 인터내셔널 하우스에 방을 구해 들어갔다.
인터내셔널 하우스는 뉴욕에서 공부하는 외국유학생들이나 학자들의 거주지이자 만남의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상당수의 한인 유학생들이 여기에 거주했고 이들은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미동부 연차총회를 인터내서널 하우스에서 개최했다. 기숙사 얻기가 어려웠던 학생들은 컬럼비아대에서 한블럭 떨어진 115가 뉴욕한인교회에 임시로 기숙할 수 있었다. 두번째 부류는 노동자들. 하와이 노동이민 중 상당수가 본토로 건너와 대륙횡단 철도 건설사업에 투입됐다가 흘러 흘러 뉴욕까지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막노동판에서 일하면서 여럿이 어울려 아파트에 합숙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뉴욕한인교회 신세를 졌다. 당시 유학생 오천석(전 문교장관)은 한인교회 1층은 성전으로, 지하실은 교회 관계자들이 사용했고, 2층 이상의 공간은 주로 오갈 데 없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살았다고 말했다.
세번째 부류로 꼽히는 자영업자들은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한인들과 접촉이 쉬운 맨하탄 100가로 부터 125가 사이 브로드웨이 서쪽 부근의 아파트에 입주해 살았다. 주일날 한인들을 만나기 쉽게 뉴욕한인교회와 인터내셔널 하우스,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이 가까운 위치, 맨하탄 업타운 웨스트 사이드에 모여 살았다. 이 지역은 해방후에도 한동안 유학생들의 주거지로 인기가 있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업타운으로부터 브로드웨이를 타고 남하하면서 78가쪽 까지 내려왔다. 당시 101가 브로드웨이 아파트에서 세 명이 자취를 했던 컬럼비아대 재학생 최병철은 아파트 한 층에 화장실 한 개를 공동으로 사용했고 조그만 방들이 여러 개 있어 방값이 쌌기 때문에 주거비를 줄일 수 있었다고 말
했다. 그 외에 방을 얻거나 옮기기가 수월했던 장점 때문에 NYU 학생들도 그쪽으로 몰렸다고 말했다.
한인들이 퀸즈 지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부터였다. 64년 플러싱 메도우즈 코로나 파크에서 열린 뉴욕 월드페어(세계박람회)가 끝나면서 이 박람회에 참가했던 2백여명의 한인들이 플러싱과 엘름허스트 일대에 눌러앉으면서 이민초기의 주거지로서 각광을 받았다. 7번 전철의 종착역이어서 교통이 편리했고 흑인들이 별로 없는데다 중산층 맞벌이 부부들의 안식처로 손꼽히는 장점이 있었다. 모든 것이 편리해서 플러싱에 살고 있어요. 올해로 46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윤해선(71)의 플러싱 애찬론이다. 지난 1963년 10월 플러싱 41애비뉴에 정착한 윤치창(초대 주영공사, 터키대사 역임)의 가족은 부부와 두 아들, 두 딸 등 6인 가족이었다. 윤치창은 뉴욕한인회 창립당시 부회장으로 한인사회에 열심히 참여했으나 곧 타계했고 부인 손진실 마저 90년대에 타계, 이 가정의 막내아들 윤해선은 아직도 플러싱에 살고 있는 최장수 거주자이다. 그는 명문 스타이브센트 고등학교 최초의 한인 졸업자라는 또 다른 기록도 갖고 있다. 웬만해서 나타내지 않지만 한국으로 치자면 그는 보기 드문 명문가의 후예이다. 구한말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의 손자이며 상해 임시정부 요직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외손자이다.
70년대 중반 새로운 이민그룹이 밀려들어 오면서 플러싱은 초기 이민자들에게 정착의 발판이 되었다. 메인 스트릿을 중심으로 상가도 형성되기 시작했고 일대의 아파트 마다 한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키세나 블러버드에 소재한 스카이라인 아파트가 고급에 속했다. 한인들이 거주지를 선택할 때 한인교회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이지역에 최초로 들어선 한인교회는 1969년 7월27일 창립예배를 본 퀸즈한인교회로 한진관 목
사(당시 강도사)가 개척해 미국교회 The First Congregational Church(Bowne St.와 38 Ave. 소재)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어 1974년2월 장영춘목사가 개척한 퀸즈장로교회, 75년10월에 김병서목사가 세운 플러싱제일교회등 세교회가 플러싱 한인 밀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플러싱 뿐만 아니라 7번 전철이 통과하는 써니사이드, 우드사이드, 잭슨하이츠 등에도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맨하탄에 직장을 가진 이들이 주로 7번 전철을 이용했으므로 갑자기 아시안계 이용객이 불어난 7번 전철을 미국인들은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고 불렀다. 초기 이민사회의 인구밀집에는 종합병원도 일정 역할을 했다. 엘름허스트 시립병원 부근에 비교적 먼저 이민
온 의사와 간호사 가족들이 소규모 밀집현상을 보였고 브루클린 킹스 칼리지 병원과 뉴저지 저지시티의 저지시티 메디칼 센터도 한인밀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무렵 브루클린의 킹스칼리지 병원과 다운스테이트 병원 부근에 한인 의사및 간호사 가족들이 30-40 가구씩 모여살고 있었다. 71년 처치 애비뉴과와 노스트랜드 애비뉴 코너에 릴리식품을 오픈했던 강병문은 당시 브루클린 한인교회 부근에도 한인들이 군데군데 거주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스태튼 아일랜드로 건너가 부동산 비즈니스를 하면서 한인들이 몰 근처 허틀랜드 빌리지와 뉴 스프링빌 등에 모여 사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브롱스에도 작지만 한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 있었다. 브롱스의 동맥이라고 할수 있는 그랜드 콩코스 지역 2백가 부근에 브롱스 한인장로교회가 창립됐고 식품점도 생겼다.
이민초기 플러싱 등지에서 고생을 하며 정착한 한인들은 점차로 주거조건이 낫고 학군이 좋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보였다. 주로 롱아일랜드 낫소카운티나 허드슨강 건너 뉴저지 버겐카운티를 선호하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낫소카운티로 간 한인들은 뉴하이드 파크, 포트 워싱턴, 사이오셋, 플레인뷰 등에 많이 정착했고 서폭카운티에서는 헌팅턴, 딕스힐등이 인기가 있었다. 플러싱에서 가까운 베이사이드, 더글라스톤, 리틀넥 지역에도 한인인구가 서서히 늘기 시작했고 플러싱 메인 스트릿을 점유하고 있던 한인상가가 중국계에 밀려 노던불버드로 진출하면서 퀸즈카운티의 경계인 리틀넥까지 연장되는 상황을 맞고 있다.
플러싱 유니언 스트릿 한인상가
■뉴저지로 뻗어나간 한인 밀집지역
뉴저지 한인장로교회 팰팍 이전
미동부 최대 한인타운 형성 일조
한편 뉴저지에는 60년대 말부터 저지시티의 메디칼 센터에 근무하던 한인 의사와 간호사 가족들이 교통이 편리한 저널 스퀘어 일대에 살고 있었다. 허드슨강 터널을 통해 맨하탄에 15-20분 이내에 진입할 수 있는 패스트레인 전철이 있었기 때문에 한때 동포들이 선호했던 지역이었다. 71년4월 저지시티에서 창립된 뉴저지제일한인교회(박재영 목사)가 인구밀집에 영향을 미쳤고 72년에 창립된 뉴저지 한인장로교회는 후에 팰리세이즈파크로 옮기면서 이 지역에 오늘날 미동부 최대 한인타운을 형성하는데 일조를 했다. 버겐카운티에서는 테너플라이, 올드태팬 부근의 학군 좋은 지역이 인기가 있었고 90년대 들어 뉴저지의 관문인 포트리와 교통이 편리한 팰리세이즈파크가 단연 인기높은 밀집지역으로 부상했다. 또한 2천년을 전후해 멀찌감치 중부 뉴저지의 에디슨 지역에 자리잡는 한인들도 늘었다.
팰리세이즈 파크 한인상가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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