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입을 일이 거의 없다는 지종식 ‘아리랑 수퍼마켓’ 대표는 “이익을 한인사회에 돌려주기 위한 ‘아리랑동산’ 설립 등이 장기 목표”라고 말한다.
지종식 가든그로브 ‘아리랑 마켓’대표
가든그로브 한인타운 1번지에 자리잡은 ‘아리랑 수퍼마켓’(대표 지종식)은 남가주의 대표적인 한인 대형마켓 중 하나다. 아리랑은 83년 3월 간판을 내건 이래 수많은 마켓들이 명멸한 약 22년 동안 한결같이 한인 식탁에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공급하는 일로 고단한 이민자들의 삶을 떠받쳐 주는 버팀목이 되어 오고 있다.
83년 창업… 22년동안 믿을수있는 먹거리 공급
근면·도전정신·친척도움으로 끝없는 성장
“아리랑이 가든그로브 살렸다” 말 들을때 뿌듯
■ 이민생활의 초라한 출발
주택 차고를 개조해 만든 소형 한국식품점이 유일하게 OC 한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던 1978년의 샌타애나. 지종식(52) 대표는 수백 명이 몰려 살아 당시 한인사회의 중심이었던 그곳에서 이민살이를 시작했다.
중앙대 농대 재학 중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다 미국에 있던 부인과 결혼하게 돼 25세의 나이로 이민 길에 오른 그였다. 형이 마련해 준 500달러를 들고 와 입국 심사대에서 짐이 너무 많은 죄로 약 300달러를 부과 당해 그야말로 맨 손으로 시작한 미국 생활. 주중엔 비행기 부품공장에서 오버타임을 하고, 주말엔 스왑밋에서 화초를 팔면서 열심히 살았다. 부인이 번 돈과 합하니 불과 1년만에 새 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 아리랑의 작은 탄생
하지만 삶의 물줄기는 우연한 기회에 틀어졌다. 1983년, 가든그로브에 중형 ‘신식 마켓’들이 하나 둘 들어서던 무렵. 이웃들이 샌타애나에 제대로 된 마켓이 섰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이었다. “타고난 성실과 근면을 지닌 종식이가 하면 성공할 거야”라며 부추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실은 그때까지 마켓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과 장을 보러가도 난 차안에서 기다리곤 했었으니까요.”
오른 집값을 이용, 에퀴티 론을 받고 친척들에게서 돈을 빌려 장모와 동업을 시작했다. 겨우 2,500스퀘어피트 규모. 아리랑 수퍼마켓의 작은 탄생이었다. 장모와 처제, 헬퍼 2명을 합해 5명이 꾸려갔다.
문전성시는 아니었지만 장사는 꾸준했다. 경비를 최소화하고 수익을 계속 재투자, 사업을 규모있게 키워갔다.
■ 끝없는 도약
하지만 도전심리가 발동했다. ‘큰 물’로 나오겠다는 결심한 것이다. 성장하던 가든그로브에서는 5-6개 마켓들이 있던 87년이었다.
샌타애나의 마켓을 장모에게 넘기고 가든그로브의 가든그로브길과 카사린다 인근에 5,000스퀘어피트 규모 새 마켓을 오픈했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손님들이 자정까지 끊이지 않고 주말이면 카트 밀 공간이 부족해 못 들어오는 일까지 생길 정도였다.
달리는 일손을 어찌하지 못해 SOS를 쳤다. 장모와 처제에게 당장 샌타애나의 마켓을 처분하고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부인도 합류시키고 한국의 형제들도 대부분 불러들였다.
“그때가 아리랑의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마켓 바로 건너편에 집을 사 온 식구가 함께 기거했죠. 해 뜨면 아침 먹고 길 건너 일하러 나가고 한 밤에 돌아와 단잠 잔 뒤 다시 출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식구들이 똘똘 뭉쳐 행복하게 일했죠.”
30여명의 직원 중 20여명을 차지했던 가족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비즈니스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성장과 더불어 문제도 발생했다.
창고공간이 부족해 당국으로부터 지적을 당하는 등 골치 아픈 일들이 늘어갔다.
지 대표는 3년여 만에 용단을 내렸다. 90년 타운 서쪽 끝 3배나 넓은 장소에서 새 출발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중심에서 조금 비켜났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나마 단골들의 꾸준한 이용과 요리솜씨 좋은 장모가 의욕적으로 펼친 반찬 판매 덕에 ‘평작’은 유지했다.
결국 그는 또 한 차례의 도약을 결심한다. “대형마켓 업주가 ‘조금 있으면 아리랑 문 닫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듣고 오기도 발동했다.
■ 현 주소와 미래의 설계
아리랑의 역사에 이정표를 세워진 것은 99년. 차압 부동산이었던, 한인타운 심장부 서울 플라자를 매입, 일부를 헐고 ‘코리아 플라자’를 지어 마켓을 옮긴 것이다.
“소유주였던 은행의 담당자로부터 어느날 연락이 왔습니다. 상가를 제대로 처분해야 하는데 내가 새 주인으로 적격이라고 하더군요. 은행측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상가 건축을 위해 지사장은 벤치마케팅 할 만한 상가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장단점을 분석하는 한편 사무실에 앉아 설계도 초안을 수도 없이 그렸다.
4만스퀘어피트 넓이 마켓에 전체 직원 60여명. 아직도 10여명의 가족들이 몸 담고 있는 아리랑은 요즘 주차장에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잘 나가고 있다.
손님의 절반 이상이 가든그로브가 아닌 세리토스, 풀러튼, 어바인, 인랜드, 샌디에고 등에서 찾아오는 한인들이고, 여타 아시안, 히스패닉, 백인 등 비한인도 전체 고객의 30%에 달한다.
또 같은 상가의 마켓 밖에서 중앙은행 지점 등 여러 업소들이 영업중이고 마켓 안에도 20여개 점포들이 들어섰다.
지 대표는 사람들이 새 상가나 들어서면서 정체 기미를 보이던 한인타운이 다시 활기를 회복한 것을 보고 “아리랑이 가든그로브를 살렸다”고 말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글 김장섭·사진 이승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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