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암 이유성 박사의 인생 스토리
▶ 한국 피겨스케이팅 초창기 개척자⋯전국체전 17회 우승

올해 갈라갤러리 전시회에 출품한 자신의 서예작품 앞에 선 이유성.
▶1930년대 코치조차 없던 시절 스스로 훈련법 만들어
▶미국 유학길 올라 럿거스 대학서 생물학 박사학위 취득
▶은퇴후 다시 서예가의 삶으로⋯ 전혀 다른 영역에서 족적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성(86) 박사의 삶을 따라가 보면, 한 인간이 세 개의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초창기 개척자, 학문적 권위를 갖춘 생물학자, 그리고 미국 무대에서 인정받은 서예가로 살아왔다. 서로 다른 세 갈래의 길이지만,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단순하고도 깊다.
바로 “치신양성(治身養性)” 몸과 마음을 닦으며 바르게 사는 삶, 그리고 “수처위주(隨處爲主)” 어딜 가든 그 자리에서 으뜸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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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어린 시절
2남1녀, 삼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덕수초등학교와 서울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거친 그는 원래 의대 진학을 꿈꿨다. 그러나 부친이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는 혼자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현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 비록 의대 문은 닫혔지만, 그는 “등록금 면제”라는 이유 하나로 선택한 서울대 사대 생물과에서 자신의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원점’을 만들다
1930년대 한국에는 빙상 종목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일본 제약회사에서 약사로 근무하신 아버지가 일본에서 들여온 피겨스케이트 한 켤레가 어린 이유성에게 건네졌다. 그것이 그를 평생 ‘선구자’로 남기게 한 첫 단추가 된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국체전 외 각종 빙상대회에서 무려 20회 출전, 그중 17회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한국은 피겨 코치조차 없던 시절이었기에,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훈련법을 만들어 남긴 이런 기록은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처음 실내빙장이 생긴 1964년 여름에는 아이스카니발, ‘스케이트 타는 춘향전’을 인기리에 공연하였는데, 이도령이라는 주연으로 출연하여 빙상경력의 피크를 경험하였다. 1970년에는 U대회가 열리는 헬싱키 국가대표 선수를 이끌고 코치/감독으로도 참가했다.
■교사, 코치, 서예가⋯1인 3역의 청년 시절
그는 진명여고의 빙상반 코치로 있다가 대학졸업과 동시에 생물교사로 발령을 받는다. 교단에서 차분한 설명, 과학적 사고를 강조하는 수업 방식, 그리고 책임감을 강조하던 그의 태도는 많은 제자들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동시에 그는 그 학교에서 특별활동 시간에는 서예 지도를 맡았다. 한 교사가 과학·체육·예술 세 분야를 동시에 가르치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서예는 운명 같은 ‘두 번째 재능’
이 박사의 서예 인생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붓글씨를 좋아하던 그는 동대문시장 헌 책방에 가서 습자책을 사보고 서예를 독학으로 연마했다. 전쟁 이후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잇던 시절, 이유성 소년이 집안 곳곳에 써 붙인 재능 있는 시조의 글씨체들은 고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바느질 고객이던 이화여고 이미경 선생은 그의 작품을 보고 “글씨가 너무 좋으네요. 즉시 유명한 서예가 이철경(이미경 선생의 언니) 선생을 찾아가 만나도록 해보세요.”
이철경 선생은 그의 붓글씨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성이 독학으로 쓴 글씨가 마치 자신의 서체를 그대로 따라 한 듯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문하생이 되었고, 첫 전시회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정식 서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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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학문의 길로
1970년 그는 학문에 대한 열망을 안고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난다. 노스이스턴 대학에서 생물학 석사를 마친 뒤, 뉴저지 럿거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부산대학교를 거쳐 충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서 강의하며 초대 학장을 지냈고, 학문적·행정적으로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미국행은 “자신의 길을 중단하고(결과적으로) 자녀의 꿈을 돕기 위한 특단의 선택”이었다. 큰 딸의 진로를 위해 1985년 다시 미국행을 택하면서, 그는 또 한 번 새로운 길을 맞이한다.
■나약칼리지 교수, 그리고 ‘연구자’라는 미련
미국에 재정착한 후 그는 나약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진정한 바람은 연구에 더 몰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연구 중심의 학자생활을 이어가기 어렵게 되자, 그는 스스로 63세에 교단을 떠나는 결단을 내렸다. 이는 새로운 인생의 장을 걸어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 ‘알암’ 서예가로의 귀환⋯후학을 세우다
교단을 떠난 뒤 그는 다시 서예가의 삶으로 돌아왔다. 뉴욕한인교회, 아름다운교회 등에서 ‘알암 서예그룹’을 만들고, 미주 한인사회에 서예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즈음 한국에서 온 한문 서예가 김순욱 의학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한문 추상서예(현대서예)를 추구하는 분으로, 이유성 박사에게도 한글로 현대서예를 해보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이 박사도 추가로 한글의 추상화 작업을 경험하면서 추상서예를 추진하는 독특한 이원 체제를 구축했다.
이 경험이 확장되어 이미 그가 결성하여 진행하는 ‘Art of Ink in America Society’에 참여하여 작품 활동하며 국제적으로 확장된 전시회에 가담하였다. 이 협회의 회원 수는 많지 않았지만 국적이 다양하고 동양서예에 관한 정열이 대단하였다. 김순욱 박사는 그후 건강이 악화되어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그 빈자리를 이 박사가 메우고 5년이상 봉사하면서 서예문화의 위상을 드높였다.
협회의 명성도 높아지면서 한국의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2017)에도 참여하게 되었고, 그의 작품은 2014년 미국 우표로 소개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또한 파리 몽마르트르, 예일대학교 중앙도서관, 뉴욕의 한국문화원, 퀸즈칼리지 Godwin-Ternbach 박물관 등지에서 열린 개인전은 그의 예술적 세계를 국제적 무대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서예대백과사전(The World Ency clopedia of Caligraphy, 2011)에는 Chapter Korean (Hangeul Syllabary) pp238-259에 이유성 박사의 글과 작품이 실려 있다.
■ 세 갈래의 길⋯그러나 하나의 철학
이 박사의 인생을 돌아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갈래의 길이 묘하게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가진 잠재능력을 십분 발현하여 남을 위해 쓰는 것, 그리고 나누는 것, 그것이 제 삶의 철학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뉴저지의 작은 공원을 산책한 후.
“어디서든 주인이 돼라” 가르침 실천하는 두 딸
■ 수처위주(隨處爲主)의 삶
그의 교육 철학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큰 딸 반디(Bandy) 박사는 예일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하바드대학교 산하 Mass General종합병원 정신과 수석 레지던트로 활동했으며, 예일대에서 임상조교수로 17년 가르치고 현재는 세계정신과의학연맹 회장이다.
작은 딸 잔디(Patricia)는 뉴욕주지사(조지 파타키) 보좌관실에서 근무하며 공공정책 분야의 전문성을 쌓았다.
두 딸 모두 ‘어디서든 주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삶으로 증명해 내고 있다.
전쟁의 상처에서 시작해, 피겨의 얼음장 위를 달리고, 실험실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다시 붓끝으로 새로운 세계를 연 한 사람. 이유성 박사의 삶은 한 인간이 어떻게 ‘수처위주’의 정신으로 어디서든 자신의 길을 새롭게 써 내려갈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기록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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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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