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인맥 자랑하던 억만장자
▶ 미성년자 성범죄 법망 피해가다
▶ 2019년 체포 후 구치소서 사망
▶ ‘권력자 성상납 감추려 자살 위장’
▶ 음모론 활용, 마가 결집한 트럼프
▶ 대선서 “엡스타인 파일 공개할 것”

지난달 23일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에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촉구하는 대형 광고 전광판이 게시돼 있다. [로이터]
최근 “목록 없다” “관심 끄자” 발뺌
‘엡스타인 고객’ 의혹까지
마가 균열로 정치적 기반 흔들려‘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죽은 지 6년이 지난 제프리 엡스타인이라는 유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그가 어떤 정책을 밀어붙여도 꿈쩍 않고 강경한 지지를 보내던 마가 진영이 최근 급격히 균열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상징하는 빨간색 ‘마가 모자’를 불태우는 영상이 빠르게 공유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열렬히 신봉하던 유명인들이 전에 없이 공격적인 발언을 내놓고 있습니다. 항상 위풍당당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몇 주째 상황을 정리하지 못한 채 분노만 표출하고 있습니다. ‘엡스타인 목록’ 때문입니다.
▲‘억만장자 범죄자’ 엡스타인이 누구길래엡스타인은 성매매 등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기다리던 중 2019년 8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한 범죄자입니다.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는 자수성가 억만장자였지만, 추악한 미성년자 인신매매범이기도 했죠.
평범한 교사였던 엡스타인은 1970년대 우연한 기회로 금융계에 발을 들이면서 인생이 바뀝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유의 수완으로 짧은 시간 내 헤지펀드 업계에 자리 잡은 그는 정재계 및 연예계 ‘거물’들과 빠르게 인맥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베일에 싸인 금융인에 불과했던 엡스타인의 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난 건 2005년 플로리다에서 한 14세 소녀의 부모가 경찰에 그를 성추행 혐의로 신고하면서였습니다. 수사를 통해 밝혀진 피해자만 30명이 넘었죠. 소녀들 대부분은 친구의 소개로 엡스타인의 팜비치 저택에 방문했고 그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엡스타인은 약점을 잡은 피해자들에게 돈이나 안전을 대가로 다른 이들을 데려오도록 했고, 다단계 구조가 만들어지며 피해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미성년자 성매매로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는 혐의였지만, 돈과 인맥으로 무장한 엡스타인은 법망을 사실상 피해갔습니다. 2008년 그는 전례 없는 수준의 사법거래(플리 바게닝)를 통해 단 18개월의 형량을 받았고, 그마저도 하루 12시간은 밖에 나와있을 수 있었습니다. 단 13개월 만에 석방된 엡스타인은 ‘소아성애 성범죄 전과자’임에도 다시 자유롭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생활했습니다. 그와 함께 목격된 유명인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부터 영국 앤드루 왕자(엘리자베스 2세의 차남), 빌 게이츠, 우디 앨런 등 어마어마했죠. 거리낄 게 없는 듯했습니다.
▲꼬리 잡힌 엡스타인… 갑작스러운 죽음에 음모론 ‘폭발’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 지명자가 10년 전 엡스타인과 사법거래를 성사시킨 담당 검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언론과 정치권이 엡스타인 사건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힘을 얻고 있던 미투 운동에 힘입어 피해자들이 앞으로 나서고 연방수사국(FBI)이 재수사에 돌입하면서 그의 악랄한 범죄들이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건 엡스타인이 1994년부터 10년 넘게 본인이 소유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로 수많은 어린 여성들을 데려가 본인 및 지인들에게 성착취를 당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섬 전체는 카메라로 감시되고 있었고, 피해자들은 사실상 성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버진아일랜드와 플로리다, 뉴욕 등 곳곳에서 양산된 피해자만 80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결국 엡스타인은 2019년 7월 체포됐고, 뉴욕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 엡스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감시 카메라가 고장난 상황에서 방에서 자살했다는 게 결론이었는데요. 황당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죽음은 거대한 음모론을 탄생시켰습니다. 엡스타인이 성상납한 수많은 권력자들이 그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몹시 그럴듯한 의심이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거죠.
▲음모론으로 흥한 트럼프, 음모론으로 흔들리나트럼프 대통령은 이 음모론을 가장 열심히 활용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엡스타인 사망 이후 민주당 인사들을 저격하기 위해 “24시간 감시를 받는 사람이 죽었을 리가 없다, 엡스타인이 빌 클린턴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는 등의 내용을 SNS에 공유하기도 했죠. 음모론 신봉자들은 즉시 호응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든든한 아군을 자처했습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선거 기간 “내가 당선된다면 ‘엡스타인 파일’의 기밀을 100% 해제할 것”이라고 발언하면서 지지자들을 열광케했습니다. 올해 초만 해도 비밀이 곧 밝혀질 것만 같았습니다. 2월 팸 본디 미 법무부 장관이 “엡스타인 목록이 내 책상 위에 있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이달 초 미 법무부는 “엡스타인의 사망 원인은 자살로 확인됐으며 (엡스타인) 목록은 없다”고 발표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 지루한 사건에서 관심을 끄자”며 대충 넘어가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마가 진영은 폭발하듯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는 엡스타인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중요한 진실을 ‘딥스테이트(그림자 정부)’가 숨기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만이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주장해 왔거든요. 사실상 뒤통수를 맞은 셈인데, 심지어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엡스타인의 ‘고객’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마가의 충성심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가 진영의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인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엡스타인 문제로 마가 지지층의 10%를 잃게 된다면, 공화당은 내년 중간선거에서 40석을 잃을 것”이라며 무시무시한 경고를 던졌습니다. 과연 무덤 속 엡스타인이 뿌린 음모론의 씨앗은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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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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