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차다. 드디어 인천공항 도착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한국어로 가득 찬 광고 사진이 정답게 내 눈에 들어온다. 부담 없이 귀에 들리는 말, 익숙한 억양. 조여 있던 마음의 근육이 따스한 봄볕 아래 피어나는 꽃처럼, 부드럽게 풀어진다.
부산행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았다. 시간은 새벽 다섯 시를 넘어서고 공항은 출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기척으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야야, 우동 한 그릇 묵으러 가자. 헹님은 안 잡술라요?” 거친 경상도 사투리의 남자들이 휘익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한 여자가 건너편 의자를 가리키며 아이 손에 야쿠르트를 쥐어준다. “할아버지께 갖다드리고 온나. 할아버지 피곤하신갑다” 친정아버지인가 보다. 공항 안의 모든 풍경이 정겹고 따뜻하다. 아, 한국. 내 고향에 왔구나.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카톡을 보냈다. ‘잘 도착했어. 한국에 오니 마음이 편하다. 뭐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전혀 안 돼. 모르면 한국사람한테 한국말로 물어보면 되니까.’ 곧 딸에게서 답장이 왔다. ‘엄마 메시지 읽으니 마음이 슬프네. 미국에서 40년을 넘게 살았는데 아직도 그렇게 느껴?’
딸의 글을 읽으니 울컥 설움이 돋아난다. 한국이 그렇게 편안한데도 불구하고 떠나 살아온 내가 측은하다는 뜻인지. 아직도 미국 생활에 편입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고있는 엄마가 한심하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돌아보니 그렇다. 한국보다 두 배나 더 긴 세월을 살았는데 왜 내 마음은 아직도 온전한 미국을 살지 못하는 건가. 내 삶의 대부분을 보냈고 남은 생도 마무리할 그곳인데. 정녕 미국에서의 40여 년이 한국에서의 20여 년을 덮지 못한다는 말인가. 내 어머니는 네 살에 일본 나고야에 들어가서 열 여덟살에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겨우 14년을 보낸 땅인데도 96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나고야, 나고야”하며 그리워하셨다.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의 근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고향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기억과 애틋함이 뒤섞인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삶의 싹을 피운 곳이자 처음으로 사랑 받고 꿈을 꾸고 세상을 배운 시간과 공간이다. 인생의 굴곡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정체성을 키워준 곳이자 날 것 그대로의 ‘나’를 기억하며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전광판에 ‘부산행 탑승중’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뜬다. 이제 나는 만나러 간다. 삐거덕거리던 나무책상과 걸상이 있던 교실, 난로 위의 알루미늄 도시락에서 풍기던 김치 냄새, 뛰어갈 때마다 등 뒤에서 딸강거리던 양철필통 속 몽당연필, 입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던 삼립빵,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갓구운 김 한 장을 아껴가며 찢어 먹던 저녁 밥상, 풋사랑을 표현 못 해 꽁꽁 숨던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집 앞을 흐르던 개울도 동네를 감싸주던 뒷동산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 차가운 아파트 빌딩만 기세등등 앉아있어 내 집터가 어디 쯤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지라도 나는 한국에 올 때마다 설렌다. 어머니의 82년이 나고야의 14년을 지우지 못 한 것처럼 나의 미국 세월도 짧은 한국 기억을 밀어내지 못한다. 유년을 함께 했던 사람과 그때의 추억은 바래지도 녹슬지도 않는다. 아니,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간절하다. 고향이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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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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