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68년부터 유대-로마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즈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맥없이 분열하여 강경파와 온건파, 두 파로 나누어졌다. 강경파의 세력이 더 우세하여 유대의 군대는 치열하게 로마 군대를 괴롭혔다.
70년이 되자 로마의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갑자기 강경해 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이제 예루살렘의의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때 랍비 벤 자카이(Ben Zakkai)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 야브네 아카데미(Yavneh Academy)를 세움으로 꺼져가던 예루살렘에 서광의 빛을 비춰주었다.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 중에서)
이스라엘에게 주후 70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패배이고 다른 하나는 승리이다. 벤 자카이는 그 당시 존경받는 랍비였다. 랍비 자카이가 느닷없이 죽은 사람을 가장하고 나무 관에 누웠다. 그 관은 철통같은 로마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예루살렘 성문을 무사히 탈출했다.
랍비 자카이는 즉시 로마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한 가지 담판을 했다. 그 담판은 예루살렘를 훼파한 후에라도 서쪽 해안에 있는 작은 마을 야브네에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단순한 군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별 생각 없이 이 청원을 허락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야브네 아카데미는 약속대로 창립되었다.
침략자 로마 군대와 대항하여 싸우지 않고 몰래 도망 나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항복한 후 작은 학교 하나 설립했던 벤 자카이에게 쏟아진 평가는 ‘배신자’, “기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변방에 숨어있던 수많은 유대 청년들이 시골 마을 야브네로 구름처럼 몰려들자 그는 일약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당시 랍비 벤 자카이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정통했다. 랍비 벤 자카이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 각 나라로 흩어질 것을 내다보고 교육으로 깨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스라엘이 큰 고난과 시련을 겪는 고비마다 도약의 돌파구가 된 것은 야브네 아카데미 덕분이다.
야브네 아카데미에서 랍비 벤 자카이는 오전에는 토라와 기도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문,사,철(文,史,哲)과 첨단과학을 가르쳤다. 야브네 아카데미는 이스라엘 도제식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야브네 아카데미 덕분에 가난한 자, 귀족이나 농민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인재가 배출되었다. 후대의 유대인들은 집단지성의 형성에 대해서 놀랐다.
랍비 벤 자카이는 ‘거대한 로마 제국이 세계를 움직이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유대인이 개인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특별한 백성으로 유다 백성이 살아남을가’에 초점을 두고 살았다.
A/G 뉴욕신학대학(원)이 창립 46주년을 맞이한다. 설립자는 김남수 원로목사이다. 1970-80년대에 물밀듯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한민족의 대이동을 바라보고 김남수 원로목사는 야브네 아카데미를 닮은 신학교를 설립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성경은 말씀한다.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