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화를 보다 경제를 읽다…귀스타브 쿠르베와 사실주의
▶ 인간의 굴레라 여기던 노동, 19세기 사실주의가 등장하며 비로소 과장·꾸밈없이 묘사
단순한 경제학 그래프 뒤에도 노동자의 땀·고통이 숨어 있어
■노동은 신성하고도 고되다
인간의 노동은 신성하다. 노동으로 생산된 가치야말로 부의 원천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만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정문 위에 다음과 같은 구호가 아직도 붙어있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이 말은 원래 성경의 바울 서신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절을 나치가 강제노동을 정당화하려 견강부회로 붙인 구호다. 다만 이런 불온한 의도를 걷어내고 본다면 노동의 가치를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역사를 보면 인간의 노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서 인간 노동의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구약의 창세기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인간은 거친 땅에서 엉겅퀴에 긁히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힘든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동의 기원에 대한 소위 ‘낙원추방 가설’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거친 노동은 일종의 죄에 대한 징벌로서 인간에게 씌워진 굴레다. 인간노동에 대한 시각이 지극히 부정적인 셈이다.
그 후에 막스 베버에 이르러 인간 노동에 대한 좋은 면이 비로소 부각된다. 베버는 근면한 노동과 절약의 정신이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가 되었다고 설파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곧 신에 의해서 부름 받은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사상)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심지어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부패한다’고까지 말하며 노동 자체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피력하기도 했다.
노동을 한자로 쓰면 ‘勞動’이다. 노동이란 두 글자에는 모두 힘 력(力) 자가 들어가 있다. 노동이 그만큼 힘이 든다는 뜻이다. 이런 노동을 통한 소득을 지칭하는 영어단어는 ‘earnings’이다. 이 말은 그냥 소득을 의미하는 ‘income’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즉, 땀을 흘려 번 노동의 대가라는 뜻이 숨어있다.
■정직한 기록을 지향한 사실주의
미술 사조를 보면 화가들이 노동자들을 그린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화가들이 주로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성경이나 신화의 이야기, 예수의 생애를 주요 소재로 그렸다. 지금 유럽 성당에서 보는 그림들은 대개 그때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 이후 화가들은 왕이나 귀족에 고용되어 그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당시 화가의 임무는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있었다. 아름다움을 화폭에 그리는 것, 그것이 곧 예술이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추한 면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미술사가 고전주의를 지나 사실주의에 이르러서는 화가들은 현실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인간의 삶 자체를 정직하게 화폭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궁핍하고 추한 인간의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미술 사조로서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 귀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et·1814~75),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1808~79)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화풍과 기법을 말한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855년 쿠르베가 당시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한 개인전에 ‘레알리슴’(realisme)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쿠르베의 이러한 리얼리즘의 입장에 대해서 당시 미술계는 그의 태도가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나는 혁명의 지지자이고 공화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실주의자이다”라고 자신을 변호하였다고 한다.
쿠르베는 농부와 노동자의 누추한 모습과 중산층 부인의 뚱뚱하고 세속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이처럼 사실주의 화가들은 현실에 대한 정직한 기록을 지향하며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그리려고 하였다.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과장이나 꾸밈없이 묘사하고자 했던 그의 사실주의 미술을 집약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1855년 파리 국제전에 출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의 그림은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당시 회화의 전통과 사회관습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기 때문에 화단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 미술관에 현현한 쿠르베
지난해 일본 와이너리 지역을 탐방하러 갔을 때 마침 야마나시 현립 미술관이 근처에 있어서 가 보았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작은 도시의 미술관도 소장 콜렉션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가령, 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상파 작품들을 보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 미술관은 밀레와 바르비종 화파의 작품 소장으로 유명하여 아예 밀레관이 따로 있을 정도다. 현립 미술관의 한 그림 앞에서 묘한 데자뷰 현상을 체험하였다. 마치 쿠르베가 일본에 현신한 느낌을 받게 한 그 그림은 야마모토 히코시로라는 현대 일본작가의 ‘돌 깨는 남자들’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림의 구도나 인물 모습, 색감 등 모든 면에서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과 판박이였다.
쿠르베의 이 작품을 보면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모자를 쓴 인부가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채 망치로 열심히 돌을 깨고 있다. 그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 보이며, 찢어진 조끼에 무릎을 기운 남루한 바지를 입은 채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다. 그를 거들고 있는 젊은 노동자는 찢어진 윗도리를 걸친 채 무거운 짐을 무릎으로 받치고 있다. 이들은 힘에 부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림에서 묘사된 노동자들의 현실은 힘든 육체노동을 통해서 먹고살 만한 소득을 얻기가 얼마나 고단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쿠르베는 이처럼 가난한 서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그 실상을 고발하였다. 쿠르베의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2차 대전 중 폭격으로 소실되어 다시는 복원할 수 없으니 그 예술적 손실이 실로 안타깝다.
■경제학 그래프에 깃든 사실주의
한국의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을 보면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처지 역시 사실주의 화가들이 그린 고단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70~80달러 정도였으며, 경제개발은 주로 섬유, 봉제와 같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 노동자들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처럼 하루에 15시간씩 일을 했으며 임금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지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역 앞에는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저개발지역 경제를 분석하여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서 루이스(Arthur Lewis) 교수는 저개발 경제에서 노동시장의 특징은 노동 공급이 ‘무한 탄력적’으로 많다는 점이며, 이 경우 임금 수준은 ‘최저 생계비’ 수준에서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태의 노동시장에서는 기업에서 노동 수요가 늘어날지라도 임금은 최저생계비 수준에서 상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의 눈은 쿠르베나 밀레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의 눈과 같을 것이다. 단 하나의 ‘수평적인’ 그래프로 저개발지역의 노동 공급곡선을 표시하지만, 그 수평적 공급곡선의 배후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애환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는 노동자의 삶과 임금의 문제를 윤리적인 구호나 고용주의 동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마음속 한편으로는 단순한 곡선 뒤에 숨겨져 있는 노동자의 땀과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돌 깨는 사람들’을 그린 쿠르베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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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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