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지내십니까...박희민 전 나성영락교회 원로목사
▶ 원로목사 자리까지 사양하고 은퇴 16년, 신학대 강의·선교…더 풍성한 삶 누려
투병 중 나를 성찰하고 본질에 초점, 남은 삶은 이웃 돌보며 집필 계속할 것
박희민 목사가 최근 암을 극복하고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박상혁 기자]
남가주 한인 커뮤니티와 교계에 박희민(83) 목사가 끼친 영향력은 단 한두 마디로 다 요약하기 힘들다.
LA의 대표적인 한인 교회인 나성영락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며 한인 교계를 대표하는 리더 역할을 했음은 물론, 한인과 흑인 커뮤니티 간 교류 강화와 화합 증진, 4.29 장학사업, 북한 돕기 등 사회적으로도 많은 공헌을 해왔다. 그의 설교는 일반 성도들도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뚜렷한 메시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랬기에 박 목사가 원로목사 자리까지 사양하고 나성영락교회를 완전히 떠나 은퇴를 선언했을 때 그를 붙잡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은퇴를 선언한지 어언 16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최근 소식이 뜸했던 박희민 목사를 직접 만나 들은 근황은 전보다 더욱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박 목사는 6.25 때 시골교회를 다니다가 어느날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자신이 왜 한국에 와 선교 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설교를 듣고 선교사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후 장로회 신학대를 졸업하고 한국 교회가 선교사 파송을 생각하기 힘들었던 시절인 60년대 말 아프리카 이디오피아로 파송돼 한국 최초의 이디오피타 선교사가 됐다.
당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자녀들이 풍토병에 걸려 치료차 미국에 잠깐 들렸는데 이디오피아가 공산화가 되면서 선교의 길이 막혔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게 이민 목회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됐다.
박 목사는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받고 토론토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했으며 하버드대에서 메릴 펠로우로 신학 연구를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선교사였으며, 분쟁으로 많은 상처가 있던 토론토 한인장로교회를 캐나다의 대표적인 한인교회로 성장시켰고, 1988년 LA 나성영락교회의 청빙을 받아 1989년 10월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16년간 나성영락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후 나성영락교회 당회장에서 아름다운 퇴진를 선언하고 2004년 1월 원로목사 자리까지 사양하고 나성영락교회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새생명선교회를 설립해 대표를 맡았고, 한미선교재단(KCMUSA) 이사장, 성시화 운동 국제 명예총재 등으로 활동을 이어왔다.
은퇴 후 삶을 묻는 질문에 박희민 목사는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산다기 보다, 오히려 새로운 일들과 그동안 마음에 있었지만 여건상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자 했는데 현재 전보다 더욱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운을 뗐다.
박 목사에 따르면 은퇴 후에도 토랜스제일교회 설교목사, 빌라델피아교회(현 주향교회), 나성한인교회, 애나하임 장로교회에서 임시당회장을 맡아 후임을 세웠고, 70세가 되던 2006년에는 될 때는 연금과 은퇴금을 모아 10만 달러를 나성영락교회에 헌금하는 등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풀러신학대학원, 미주장신대, 아주사퍼시픽대학교 신학대학원 등에서 객원교수 또는 교수로 강단에 섰고, 집필 활동도 꾸준히 했으며, 특히 나성영락교회 부임 전부터 품고 있던 선교의 꿈을 펴기 위해 새생명선교회 회장, 한미선교재단 이사장, 한인세계선교협의회 의장 등을 지내며 선교에 힘썼는데, 마음에 품었던 일을 하니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보람됐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그러다 뜻밖에 암 투병을 한 사실도 전했다. 작년 6월부터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 종합검진을 받는데 전립선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박 목사는 “임파선을 타고 심장, 폐, 골반, 뼈에 퍼진 상태였다”며 “충격적이었지만, 이내 추스르고 치료와 기도에 힘썼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 수술은 불가능했고, 옆에서 가족들도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긍적적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며 약물 치료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죠. 올해 4월 CT 촬영시 80~90% 치료됐다고 판정을 받았습니다. 현재는 각종 수치도 정상이며, 과로만 자제할 뿐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박 목사는 이렇게 ‘죽음에 가까웠던 경험’이 결과적으로 유익했다고 말한다. 삶을 제대로 돌아보게 됐고, 죽음 앞에 서니 명예나 물질보다 본질적인 것에 자연스레 초첨을 맞춰 살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성찰을 하게 되고 하나님이 건강을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됐다. 또한 가족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며 “앞으로 남은 생애를 하루하루 더 뜻 깊고 보람 있게 보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활동을 회고하며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을 묻는 질문에 박 목사의 답은 그동안 그가 얼마나 커뮤니티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는가를 알 수 있게 했다.
“정말 많은 직함을 가지고 많은 활동을 한 것 같네요. 특별히 1990년대 초 부터 한인과 흑인 커뮤니티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을 무렵, 목회자들과 한흑 기독교 연맹을 조직해 공동의장으로 섬겼죠. 1991년 첫 행사로 흑인들과 함께 시청 앞에서 3,000여명이 모여 인종화합대회를 가졌고, 4.29 폭동 이후에도 강단 및 찬양대 교류, 장학금 지원, 흑인교회 지도자 한국 초청 등을 통해 화합에 앞장섰었죠”
박 목사는 또 한국 정부와 나성영락교회와 한국 교회로부터 보내온 성금으로 4.29 장학재단이 만들어져 초대위원장으로 섬긴 일도 뜻깊었고 이외에 북한 어린이를 도운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 나성영락교회에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했던 것 등이 보람 있고 소중한 기억들이라고 회고했다.
당회장으로 몸담았던 나성영락교회가 한때 분열을 겪었던 것에 대해 박 목사는 “나에게도 큰 아픔이었고 관계자로 큰 책임감을 느꼈다”며 “이제는 나성영락교회가 새 담임목사의 리더십 아래 빨리 회복되고 치유되며 이전의 영광스러운 성장과 부흥이 오기를 기도할 뿐”이라고 말했다. 또 “새 교회를 개척해 나간 교인들도 행복하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교회를 섬기길 기도한다. 그들도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섬기던 귀한 성도들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박희민 목사는 80대의 나이에도 아랑곳 않고 앞으로도 선교 활동과 후계자 양성을 계속하면서 책 집필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그러나 무엇보다 건강함에 감사하고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을 더 챙기고, 이웃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오늘 하루를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어 “많은 한인 분들이 이민생활에 바쁘고 힘들고 지치겠지만, 주변사람들에게 자주 눈을 돌리고, 다시 오지 않을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고 덕담을 잊지 않았다.
박희민 목사 약력- 1936년 충남 예산 출생.
- 장로회 신학대 졸업,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 석사
- 토론토대 박사학위 취득, 하버드대 메릴 펠로우
- 이디오피아 선교사
- 토론토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 캐나다 장로교 한인교회협의회 회장
- 나성영락교회 당회장, 원로목사
- 미주한인장로회 총회장
- 미주장로회신학대학 총장
- 한인세계선교협의회 의장
- 우리민족서로돕기 미주대표 회장
- 성시화운동 미주대표 회장
- 현 한미선교재단(KCMUSA) 이사장, 성시화운동 국제명예총재
- 저서 ‘사람을 품으라’ ‘21세기 영적 리더십’ 등 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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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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