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 신년특집 / 뉴욕·뉴저지 한인타운 발전사
맨하탄 32가 한인타운.
뉴욕 한인타운은 6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 갑자가 지나간 것으로 이 기간 뉴욕의 한인들은 급속한 경제적 성장을 만들어냈다. 2018년 현재 뉴욕 맨하탄 32가와 퀸즈 플러싱, 뉴저지 팰리세이즈팍과 포트리에 한인타운이 둥지를 틀었고 뉴욕과 뉴저지 곳곳에 한인상권이 형성되는 등 한인의 위상을 당당히 세우고 있다 50~60년대를 유학생과 주재원 중심의 ‘태동기’로 70-80년대를 ‘발전, 성장기’로, 90~2000년대를 ‘위축기’로, 2010~2018년대를 ‘정체 및 재도약기’로 각각 구분해 뉴욕 한인타운의 발전사를 돌아본다.
70년대 맨하탄 브로드웨이에 한인 도매상권 형성
80년 ‘제1회 코리안 퍼레이드’ 한인위상 주류사회 알려
2007년 맨하탄 K-타운 내 한인 빌딩보유율 50% 넘어
한류바람타고 한인식당 등 찾는 타인종 발길이어져
■ 태동기(50~60년대)
한국전쟁 이후 이민이 제한적으로 이뤄진 시기로 뉴욕한인사회는 유학생과 지상사 주재원 등이 주류를 이뤘다. 당시 한인인구는 1,000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한인사회는 유학생들이 주도했는데 대부분 맨하탄에 거주했고, 한인식당도 아리랑 등 2~3곳에 불과했다.
1960년 뉴욕한인회가 출범하면서 한인사회의 구심점이 됐다. 64년 퀸즈 플러싱 메도우 코로나 팍에서 ‘제2회 뉴욕세계박람회’가 열리면서 퀸즈 플러싱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당시 박람회를 위해 뉴욕에 온 350여명의 관계자 가운데 2/3이상이 귀국을 하지 않고 플러싱 등지에 정착하면서 첫 한인 거주지역(베드타운)이 형성됐다.
60년대 인기를 끈 가발 비즈니스는 한인상권 형성의 토대를 마련했다. ‘수출입국’의 기치아래 가발 비즈니스를 위해 미국에 진출한 한국기업과 한인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맨하탄 브로드웨이에 몰려들면서 브로드웨이 한인상권이 태동했다.
하지만 초창기 한인 이민의 물꼬를 튼 것은 68년 ‘이민개정법’(Hart-Celler Act)이 통과되면서 부터다. 이로 인해 한인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유입됐다.
■발전, 성장기(70~80년대)
이민법 개정으로 이민자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한인 이민자수는 60년대 1,500~2,000명에서 69년 6,045명, 70년 9,314명, 73년 2만명으로 늘었고, 76년부터는 3만명 이상 매년 미국에 들어왔다.
70년대 들면서 한인 거주지역도 맨하탄과 더 가까운 퀸즈 엘름허스트와 잭슨하이츠, 브롱스 일대 등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또한 사회 및 경제단체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구증가에 따라 전문 분야가 크게 다양해진 탓이다.
가발 비즈니스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가발 외 모자와 보석, 신발을 취급하는 도매상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맨하탄 브로드웨이에 40여개의 한인 도매상이 들어서는 등 한인상권이 제대론 된 골격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인상권이 급속히 팽창, 브루클린과 브롱스, 퀸즈 자메이카, 맨하탄 할렘 등으로 뻗어나갔다.
79년 브로드웨이한인상인번영회(현 뉴욕한인경제인협회)가 결성되면서 맨하탄 32가 한인타운이 그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80년 뉴욕한인회가 주최하고 뉴욕한국일보가 주관하는 ‘제1회 코리안 퍼레이드’가 맨하탄 한복판에서 열려, 한인사회의 위상을 처음으로 미 주류사회에 당당히 알리는 계기가 됐다.
80년대는 한인사회 발전의 황금기다. 80년대 초 플러싱은 한인인구가 1만 명을 넘어서면서 메인스트릿과 루즈벨트 애비뉴를 중심으로 상권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특히 플러싱은 주거지역이었던 만큼 다른 상권과는 달리 식당과 수퍼마켓, 선물가게, 서점, 보험, 의류점, 여행사 등 의식주와 관련된 업종들이 주류를 이뤘다. 84년 신축한 플러싱 유니온 상가는 당시 전체 130여개 업소 중 95% 이상이 한인업소로, 명실상부 플러싱 한인타운의 상징이었다.
■위축기(90~2000년대)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인경제는 90년대 들면서 다소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서 한인상권도 연쇄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 더욱이 IMF 사태로 한국에서 유입되는 한인이 이민자가 아닌 유학생과 지상사 직원 등으로 변하면서 한인상권의 업종 변화가 시작됐다. 브로드웨이 도매상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맨하탄 32가 한인타운은 한인 유학생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업종으로 교체됐다.
95년 맨하탄 32가에 ‘코리아 웨이’ 표지판이 내 걸리면서 맨하탄 32가는 뉴욕을 대표하는 한인타운으로 자리매김했다.
발전을 거듭하던 플러싱 한인상권도 위기를 맞았다. 한인업체끼리 과당경쟁을 벌이면서 렌트 폭등을 불러왔고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인 유입이 크게 늘면서 메인스트릿 상권을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중국 자본이 뉴욕에 대거 유입, 메인스트릿 상권을 중국계에 빼앗겨 노던블러바드 선상으로 밀려나 동진을 시작했다.
한인 거주지역 확산 속도도 빨라졌다. 교육 및 주거환경 등을 이유로 플러싱에서 베이사이드와 롱아일랜드로의 이주가 늘면서 노던블러버드를 따라 한인상점들이 줄줄이 들어서는 등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2000년대 한인상권은 또 다른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 911테러가 발생하면서 이민 행렬이 사실상 중단된 것은 물론,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한인경제는 뿌리 채 흔들렸다.
하지만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한인들은 금융위기를 잘 극복, 한인경제 회복에 나섰다.
한인사회만이 아닌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에 나서면서 성공사례들이 속출했고 80년 만큼은 아니지만 성장기 때 경기를 어느 정도 회복한 업소들이 늘어났다.
이 시기 한인들의 부동산 투자도 활발해졌다. 2007년 맨하탄 한인타운 내 한인 빌딩보유율은 50% 넘어서 이름만 한인타운이 아닌 실제 한인들이 주인인 한인타운으로 자리매김했다.
■ 정체 및 재도약기(2010~2018 현재)
2010년 연방센서스 결과, 뉴욕의 한인인구는 14만994명으로 2000년 보다 17.65% 증가했다. 하지만 한인인구는 2015년 최고점(15만5,386명)을 찍은 후 내리막을 걷고 있다. 2017년 뉴욕의 한인인구는 14만3,305명으로 전년대비 1.4% 줄어, 한인이민은 정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인인구 감소는 한인경제에 영향을 미쳐 전문직 업소를 제외한 일반 소매업소들은 감소하거나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주류 사회와 달리 한인 사회의 경기침체는 여전한 상황이다.
하지만 2015년 미주한국일보가 퀸즈 플러싱에 있는 “코리아빌리지”를 중국계로부터 인수하면서 명실상부, 퀸즈 플러싱 한인상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하는 등 재도약에 힘이 실렸다.
또 한류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한인업소를 찾는 타인종이 급증하면서 맨하탄 한인타운과 플러싱 한인타운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한인식당들은 이미 한인보다 중국계 등 타인종 고객이 더 많아 주류사회 업소들과 다를 바 없는 호황기를 맞고 있다.
한인 부동산 시대 개척한 뉴욕한인이민역사 산 증인
한미부동산 홍종학 대표
한미부동산의 홍종학(사진)대표는 뉴욕한인이민역사의 산 증인이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지난 74년 도미, 뉴욕에 정착한 홍 대표는 이민 첫 해 뉴욕 메클라클린 부동산 회사에 입사한 한인 1호 부동산 전문가다.
플러싱 한인타운 형성기인 78년 플러싱 루즈벨트 애비뉴에서 한인 최초 한미부동산(당시 홍 리얼티)을 개업, 한인 부동산 시대를 열었고 올해로 40년을 맞았다. 개업 3년 후 뉴욕 메클라클린 부동산을 인수했고 84년 유니온 스트릿에 한미부동산 자체 사옥을 신축해 오늘에 이른다.
홍 대표는 “70년대 중후반 7번 전철 종점인 플러싱 메인스트릿역은 서울역을 연상케 했다”며 “당시 한인 이민자들이 메인스트릿 역으로, 플러싱으로 밀물처럼 몰려왔다”고 회상했다.
홍 대표에 따르면 ‘제2회 뉴욕세계박람회’ 직후 시작된 이민 물결이 70년대 말까지 이어지면서 렌트 계약이 폭주하는 등 한인이민이 러시를 이뤘다. 홍 대표는 70년대 중후반 뉴욕의 한인 인구는 플러싱 5,000여명을 포함해 전체 약 2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홍 대표는 “70년대 초 9만달러에 달했던 주택이 현재 200만달러를 넘어섰다”며 “뉴욕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부동산 투자는 개인 재산증식은 물론 든든한 한인타운 형성의 밑거름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진수 기자>
팰팍 브로드웨이 선상에 한인 업소들이 줄지어 영업 중이다.
뉴저지 한인 인구 57.3% 버겐카운티에 집중 거주
1980년 팰팍 한미수퍼마켓 한인 상권 시초
1992년 잉글우드 H마트 첫 지점 열며 한인마트 급증
교통.샤핑 편리한 팰팍 대표적 한인밀집지역 성장
■뉴저지 한인인구 증가
2016년 기준 뉴저지 한인 인구의 수는 총 10만581명이다. 연방센서스국의 ‘아메리칸 지역사회 조사(ACS)’에 따르면 2016년 미국 내 한인(혼혈 포함)은 181만6,597명으로 뉴저지 한인 인구는 전국의 5.6%에 이른다. 뉴저지 한인 인구 중 한인 밀집지역인 버겐카운티내 한인 인구는 총 5만7598명으로 뉴저지 한인 인구의 과반수인 57.3%가 버겐카운티에 집중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팰리세이즈팍이다. 9,294명으로 타운 전체의 인구인 약 2만명의 절반 가까이를 한인이 이루고 있는 것. 인구 3만8,000여명의 대도시인 포트리 역시 한인의 수가 7,873명을 차지, 뉴저지에서 가장 한인 인구가 많은 지역 중 하나다. 이외에 릿지필드는 3,434명, 레오니아 2,756명, 클로스터 2,133명 등 팰팍을 중심으로 인근에 한인 밀집 지역이 형성, 확산돼 오고 있다.
■1960년대부터 한인 인구 뉴저지로 유입
한인 인구가 뉴저지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으로 유학와서 자리를 잡은 유학생 출신 1세들과 취업 이민을 온 간호사들 등이 속속 도착하면서 이민 사회의 시초가 된 것. 저지시티, 뉴브런스윅, 체리힐 등 뉴저지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자리를 잡아가던 한인들이 본격적인 한인 타운을 형성하기 시작한 곳은 북부 뉴저지다.
■1980년대말 한인상권 형성
1975년 뉴저지 한인회가 저지시티에서 설립, 주유소를 경영하던 김상진 초대 회장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뉴저지 한인회가 한인들의 증가에 따른 한인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면 이후 뉴저지 한인 타운의 형성은 상권 발전과 궤를 함께 한다.
1970년대 말 뉴저지 포트리의 메인 리커 스토어와 액세서리 전문점 백스바이수지를 한인이 인수하고 1980년 팰팍에 한미수퍼마켓이 문을 연 것이 뉴저지 한인 상권의 시초로 알려졌지만 본격적인 한인 상권이 태동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80년대 말부터다. 1987년 금호 식당이 팰팍 브로드애비뉴 선상에 문을 연 이후 한인 식당들과 가구점, 회계 사무실, 병원 등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잉글우드에 H마트가 뉴저지 첫 지점을 연 것을 시작으로 1993년 한양마트가 뉴저지 버겐필드에 문을 열며 진출했다. 30년간 비약적인 속도로 인구가 몰려들면서 한인 마트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H마트가 1999년 릿지필드와 리틀페리에 지점을 연데 이어 2009년 릿지필드에 한양마트가 대형 샤핑몰을 구축했으며 2010년에는 한남체인이 동부 지역 진출 교두보로 포트리에 지점을 열었다.
맨하탄까지 버스로 30분이면 갈수 있는데다, 업종별로 한인 상점들이 다양하게 자리잡으면서 차 없이 샤핑이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인해 팰팍은 뉴저지 뿐 아니라 동부지역 대표적인 한인 밀집 지역이 됐다. 브로드애비뉴 선상 약 2마일을 따라 자리잡은 전문직 사무실, 학원, 식당, 은행 등 약 500개의 한인 업소들이 운영 중이다. 이는 브로드애비뉴 전체 업소 중 약 90%를 차지한다는 것이 타운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타운 정부 진출 한인들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공직 진출도 두드러지면서 팰팍 클럭 오피스의 소피아 장 행정담당, 포트리 위생 검열관 존 강 인스펙터 등 약 50명의 행정직 직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인 권익위해 발벗고 나선 팰팍 한인타운 터줏대감
남완희 팰팍 상공회의소 초대회장
“타민족들과의 조화와 이를 통한 타운 발전이 한인 밀집지역의 다음 과제죠.”
남완희 팰팍 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은 동부지역 대표적인 한인 밀집지역인 뉴저지 팰팍에서 가구점 사장으로, 타운 정부 관계자로 지난 30년을 보냈다. 팰팍 한인타운의 산 증인인 그는 “1세들이 초창기 한인 타운을 일구었지만, 이제는 2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타민족들과의 협업으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브로드 애비뉴에 그랜드 가구점을 연 것은 1989년이다. 1980년대 말부터 식당, 회계사 등 한인 들이 점점 몰려들면서 1990년 상공회의소를 설립, 초대회장에 오른 남 회장은 이후 타운 정부에서 시장 대변인, 개발위원회 위원 등 약 25년 동안 타운 정부 행정직 한인으로 활동해왔다.
남 회장은 한인들의 권익을 찾자며 상공회의소를 만들고 한인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한인들과 기질이 비슷한 이탈리안이 주류인 팰팍 타운측과 한인들간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을 때면 남 회장이 양측의 입장을 서로 이해시키려 하다 어김없는 화살이 날아들기도 했다.
남 회장은 “1960년대 70년대는 지나가다 아시안만 봐도 한국인인가 말을 걸 정도로 한인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한인 업소들은 이제 라티노 직원 없이는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타민족 직원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으며 일찍부터 터를 잡은 이탈리안들과는 지속적인 협업을 해 나가야 한다. 이미 한인 타운이 형성되고 한인 커뮤니티가 힘을 기른 상황에서, 앞으로는 타민족들과의 조화가 한인 타운 발전의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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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수·최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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