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21세기 SF문학계의 총아 테드 창
▶ 원작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작년 영화 ‘컨택트’로 만들어 주목

테드 창 원작의 영화 ‘컨택트’

테드 창
작년 초에 개봉한 영화 ‘컨택트(원제:Arrival)’는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현재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인물 중 하나인 드니 빌뇌브가 감독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시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게 하는 심오한 주제를 담아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룬 SF영화사에 새로운 족적을 남긴 점 등이 회자된 것이다. 원래 봉준호 감독에게 먼저 연출 제의가 갔으나 제작사에서 건네준 각본이 마음에 안 들어 봉 감독이 직접 각색하려다가 스케줄 문제로 손을 떼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관심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원작의 영화화가 어떤 모습의 결과물로 나왔을지 궁금해한 SF팬들의 기대였다. 세계 SF문학계가 주목하며 늘 신작 발표를 고대하는 탁월한 작가의 작품이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컨택트’의 원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쓴 테드 창이다.
■과학과 인문을 아우르는 새로운 ‘하드SF‘
이 작품에서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지구에 온 외계인과 소통을 계속 시도하다가 그들의 문자 체계를 깨우치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 미래의 정보까지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순한 예측이나 전망이 아니라 실제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원작소설에는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를 포함한 여러 물리학적 원리들이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미래를 동시에 본다’고 하는 과정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득력 있게 서술되고 있다. 주인공은 이를 통해 자신의 아이가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제안한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간다는 순차적 성질로 인식하기에 원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즉 미래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품 속 외계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으로 암시된다. 그 모든 것에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우주의 원리가 깃들어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도 실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언어철학과 결합된 놀라운 과학적 상상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이처럼 과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까지 포괄하며 경계를 넘나드는 확장된 상상력을 추구하는 것이 테드 창의 특징이다. 기존의 하드(hard)SF가 과학기술 영역에 국한된 고난도의 묘사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테드 창은 새로운 경지의 하드SF라고 할 만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때로 SF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고 할 신화나 종교의 소재까지도 자유롭게 취하면서 융합적, 또는 통합적 상상력을 전개한다. ‘지옥은 신의 부재’나 ‘바빌론의 탑’ 등을 읽는 독자는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상상력의 지평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SF문학계의 보르헤스’ 테드 창
금년으로 28년째 작가로 활동해오고 있지만, 테드 창은 이제껏 중단편만을 썼을 뿐 장편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단편 작품 하나하나는 매우 밀도가 높은 문장과 구성들로 주제를 다루어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색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르헤스를 연상케 한다. 보르헤스 역시 단편소설만을 집필했으며 본인 스스로가 장편의 서사보다는 단편을 통한 아이디어나 이미지 전달을 선호했다.
테드 창도 캐릭터와 드라마 위주의 스토리텔링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다만 중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은 동물 조련사 출신인 주인공이 인공지능을 장기간에 걸쳐 돌보면서 인간 사회에 대해 학습하고 적응하도록 도와준다는 내용이다. 여러 인공지능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캐릭터로 등장하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환경에 따른 그들의 성장이나 변화도 담담하게 묘사된다. 이 작품은 ‘알파고’가 화제가 된 뒤로 인공지능의 미래 전망에 참고할 만한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사실 아이디어가 빛나는 중단편들을 꾸준히 생산한 작가들은 SF문학사에 결코 적지 않지만 테드 창만큼 폭넓은 주제 영역과 심오한 통찰이 깃든 상상력을 결합해서 계속 내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21세기 장르문학의 특징은 SF와 판타지, 그리고 주류문학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인데, 테드 창은 그러한 추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구현해 보이고 있는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이른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라는 슬로건에 적합할 만한 상상력의 세례를 받게 된다.
■특이점 이후의 포스트 휴먼을 전망하다
테드 창이 2000년에 ‘네이처’지에 발표한 ‘인류 과학의 진화’는 단편이라기보다 엽편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짧은 소설이다. 그러나 내용만큼은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포스트 휴먼, 또는 특이점(singularity) 이후의 신인류에 대한 고찰로서 무척 의미심장한 설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와 같은 구인류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아득한 지적 능력을 지닌 ‘메타인류’와 공존하는 미래가 배경이다. 메타인류는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후예이지만 그들의 두뇌는 ‘디지털 신경 전이’라는 기능이 있어서, 이를테면 정보의 습득과 처리를 슈퍼컴퓨터 수준으로 할 수 있다. 세월이 갈수록 그들은 구인류와의 격차를 점점 벌여나가 결국은 문화적으로 사실상 단절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그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식이나 기술을 이해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특이점이라는 개념은 발명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에 의해 널리 알려졌는데, 그는 21세기 중반이면 인간이 기계, 즉 컴퓨터와 결합하여 새로운 신인류로 거듭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 정보가 디지털화하면서 의식이 사이버공간으로 전이하는 때, 즉 특이점이 오면 인간은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과감한 주장을 펴는 것이다. 테드 창의 단편 ‘인류 과학의 진화’는 바로 그러한 특이점 이후에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로 갈라지는 구인류와 신인류의 행보를 매우 충격적으로 묘사했다.
사실 커즈와일의 특이점 전망은 비판이 만만치 않다. 사회 문화나 과학 윤리적 문제도 있고, 기존 산업계의 보수적 관성 역시 그런 변화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드 창 본인은 실제로 그러한 포스트 휴먼의 시대가 올 것이라 믿고 있을까? 이 질문을 테드 창이 한국에 왔을 때 사석에서 직접 한 적이 있는데, 대답은 ‘아니오’였다. 적어도 우리 세대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는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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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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