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스페이스 오페라의 창시자 E. E. 스미스
▶ 1920년대 ‘우주의 스카이라크’ 최초의 우주 배경 활극모험담
E. E. 스미스
공군 피스아이 공중조기경보통제기. 고성능 레이더를 탑재한 항공기가 원거리에서 적 항공기를 포착, 적의 공격 초기에 대응한다는 조기경보체계 개념은 SF 작가 E. E. 스미스에게서 비롯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스타 워즈’ 시리즈의 새 작품 ‘라스트 제다이’가 개봉했다. 국내 흥행은 신통치 않지만 ‘스타 워즈’를 모르는 이는 없다. 역시 국내에서 큰 인기는 없지만 ‘스타 트렉’도 우리에게 영 낯선 이름은 아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제목에 ‘스타(star)’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들은 광활한 우주를 누비며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우주활극담이다. 드넓은 우주를 배경으로 삼는 이야기답게 온갖 기묘한 외계생명체며 외계인들이 이질적인 풍광의 천체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여러 신기한 과학기술들이 등장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런 장르를 SF 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한다. 20세기 과학시대를 가장 잘 상징하는 대중문화 중 하나다. 이렇듯 과학적 상상력과 우주 배경을 스토리텔링으로 결합시켜 최초로 대중적 인기를 끌어 낸 인물, 그가 바로 ‘스페이스 오페라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E. E. 스미스이다.
■제국주의적 확장의 정서
엄밀히 따지자면 지구가 아닌 외계에서 활약하는 영웅 이야기로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은 스미스 이전에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화성의 공주’(1912)가 있었지만, 이 작품은 화성에서만 펼쳐지는 내용이고 설정도 과학적 상상이기보다는 판타지에 더 가깝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의 명실상부한 시초는 스미스의 ‘우주의 스카이라크’(1928)를 꼽는다. 일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인류가 태양계를 벗어나 활약하는 최초의 SF라고 한다.
천재 과학자인 주인공은 우연히 발견한 미지의 광물질이 우주여행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원임을 깨닫고 사업화를 추진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순한 욕망을 품은 악당에게 아이디어를 도용당하고 약혼자까지 납치된다. 주인공은 절친한 동료 사업가와 함께 우주선 스카이라크를 타고 악당을 추적하는 길에 나선다. 이렇게 시작되는 ‘스카이라크’ 시리즈(1928~1966)는 모두 4편이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렌즈맨’ 시리즈(1934~1948) 6편은 수 억 년 전의 우주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압도적 스케일로 그야말로 본격 스페이스 오페라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평화를 사랑하며 정신적 능력을 극대화시켜 온 외계 종족과, 지배와 정복을 추구하는 또 다른 외계 종족. 이 두 세력의 대결이 지구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은하순찰대의 활약을 통해 전개되는 내용이다.
사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이름은 원래 시니컬한 뉘앙스를 담은 멸칭이었다. 서부극은 카우보이들이 말을 타고 인디언과 싸운다고 해서 ‘호스(horse) 오페라’라고 불렀고, 라디오 연속극은 가정주부를 겨냥한 비누 회사의 광고와 함께 나와서 ‘소프(soap) 오페라’라고 부르곤 했는데, 비슷한 식으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웅담에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스미스에 의해서 촉발된 스페이스 오페라의 붐은 이른바 ‘펄프 SF’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건장한 백인 남성이 악당 외계인에게 붙잡힌 금발 미녀를 구한다는 식의 기본 서사구조가 수없이 변주되며 통속적 SF콘텐츠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본질적으로 서양의 영웅 기사담을 배경만 우주와 미래로 바꾼 것일 뿐이었고, 바탕에 제국주의적 확장의 정서가 깔려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현대 군사과학의 벤치마킹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를 만들다시피 한 스미스는 ‘스카이라크’와 ‘렌즈맨’ 두 대표작만으로 오랫동안 문파의 당주 지위를 누렸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20년대 말에 첫 선을 보인 뒤 무려 40여 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군림했으며, 특히 과학기술계에 종사하는 연구자에게도 널리 읽혔다.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기본적으로 우주 배경의 전쟁이나 전투 장면이 자주 나올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갖가지 아이디어들은 현실의 군사과학에 적잖은 영감을 제공했다. 스텔스 기술, 조기경보체제, 또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이른바 ‘스타워즈 계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전략방위구상(SDI) 등은 모두 스미스의 작품들에 나왔던 개념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사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의 칼 래닝 제독이 군함의 전투지휘통제소 디자인을 스미스의 ‘렌즈맨’ 소설에 나오는 그대로 채택하여 일본 해군과의 대결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밝힌 일이다.
처음에는 비꼬는 의미가 들어있었던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이름은 곧 SF의 대표적인 하위 장르 중 하나의 명칭으로 굳어져 가치중립적 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과학기술 및 SF적 상상력의 발전이 이어지면서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이야기들도 계속 선을 보였다. 현재 스페이스 오페라는 단순한 우주활극담 수준을 넘어 우주 속에서 인간과 생명의 기원, 그리고 그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변소설의 경지에까지 올라 있다.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1989)이나 이언 뱅크스의 ‘플레바스를 생각하라’(1987) 등이 좋은 예이다.
■한국의 스페이스 오페라 수용
스미스의 소설들은 현재 한국어 완역판이 나와 있지 않지만, 지금의 50대 이하 중년층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한 번씩은 접했던 작품이었다. ‘스카이라크’와 ‘렌즈맨’의 아동용 축약판은 60년대에 처음 출판된 뒤 40여년이 넘도록 여러 판본으로 계속 나왔으며, 1984년에 일본에서 제작된 ‘렌즈맨’ 애니메이션 시리즈도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한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소설은 일본 작가 다나카 요시키가 쓴 ‘은하영웅전설’일 것이다. 원작 소설이 1988년에 전 10권으로 완간된 뒤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 등 다양한 각색 버전이 함께 수입되었는데, 원작 소설은 한국에서 100만부에 달하는 누적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은하영웅전설’은 세계관 설정부터 캐릭터, 정치, 과학기술, 군사전략 등 스페이스 오페라에 나오기 마련인 온갖 측면들이 방대한 양의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어서 한국에 적잖은 매니아 층을 형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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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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