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뿌리교육재단 이정화 명예회장
어릴적 부터 리더십 남달라…정치인 꿈 접고 이민길
1995년 뉴욕한인회장 맡아 회관정상화 기틀 마련
“뿌리교육은 역사교육에서”…이민사박물관 개관환영
그는 한인2세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한인사회의 희망이고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뿌리교육을 가르치며 한인사회의 차세대 인재 양성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2000년 뉴욕뿌리교육재단을 창설한 것도 그런 이유다.
모국방문프로그램을 통해 한인 2세들에게 한국 전통문화와 역사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코리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할에 나선 것이다. 조국을 올바로 이해하면 민족번영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더불어 미 주류사회의 일꾼으로 성장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재단의 모토를 ‘자신의 뿌리를 알고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인후예 양성’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뿌리교육재단의 창설회장이자 현재도 한인사회 차세대 인재양성에 앞장서고 있는 이정화(77) 명예회장이다.
■정치인을 꿈꾸던 소년
그는 1940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1녀5남의 셋째. 아버지는 소작농을 두고 있던 동네 유지. 어린 시절 고향은 산수가 화려한 작은 동네 마을이었다. 개울가에선 물고기와 잠자리를 잡던 기억. 작은 마을 학교에선 반장, 동네에서는 골목대장이었다. 역사과목을 좋아했고 음악, 미술 등 예능에 재능이 있었다. 고향에선 5학년까지 살았다.
1.4후퇴 때 가족이 대구로 피난왔기 때문. 대구의 초등학교는 피난시절이라 주로 운동장에서 공부했다. 중학교 때는 웅변 실력이 뛰어났다. 전국대회 학교대표다. 고등학생 때는 농촌계몽운동에 열성이었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는 영향을 받은 탓. 당시 글을 모르던 농촌 주민대상 ‘문맹퇴치’에 적극 나선 이유다.
학창시절 리더십이 월등했다. 학급반장은 기본. 조회 때는 학생대표로 전교생 앞에 나서기 일쑤. 남다른 웅변실력으로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이미 그 때부터 정치인(?)의 자질을 보였던 셈이다. 그는 예능에 관심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희망인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는 정치인이 된다면 ‘대통령’까지도 도전해 보겠다는 청춘의 혈기가 왕성할 때였다.그는 농촌계몽운동에 몰두하다 공부를 조금 소홀히 했다.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계획을 접고, 영남대 법정대학 법학과에 입학한 이유다. 당시 법관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계진출을 위한 발판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과학기술처 비서관으로 3년 정도 일했다. 1990년엔 이효상 국회의장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과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이의장이 선거에 낙선하면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평소 미국서 공부를 하고 싶었고 국회진출용 스펙 쌓기였다. 1972년부터 1973년 인디아나 폴리스 버틀러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수학한 이유다. 하지만 그는 정계진출의 꿈을 접고, 1975년 미국 이민을 결행했다.
■뉴욕한인회관 악성부채 해결
그의 이민은 부인의 의사 취업으로 이뤄졌다. 아내는 1967년 만났고 5년 정도 연애 후 1972년 결혼했다. 7살 차이인 아내는 내 친구의 동생 소개로 만난 병원장 딸이었다. 아내는 한국서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국립의료원에 근무했다. 이민 와서는 미국 의사 자격시험부터 새로 시작했다. 브롱스의 몬테피오리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미국 병원에서 40여년 정도 마취과 전문의로 근무하다 1년여 전에 은퇴했다.
이민 초기 그는 브로드웨이 가방도매상 호산나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8개월 정도 근무하다 행상 길에 나섰다. 처음에는 매트리스를 취급하다 핸드캐리가 편한 귀금속으로 바꾸었다. 아내 대신 어린 두 자녀를 돌보기에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행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행상 후 80년대 후반 맨하탄 47가에 ‘미주보석’를 개업했다.
90년대 초반 뉴욕귀금속보석협회장을 지낸 그는 뉴욕한인회장을 지낸 뒤 다시 ‘이정화 다이아몬드’를 운영했다. 2000년대 초반 20여년이 넘은 행상과 점포운영의 귀금속 사업을 접고 은퇴했다.
그의 뉴욕한인회 활동은 제17대 강익조 회장 당시다. 뉴욕한인회관 구입 가두캠페인 때 이사로 참여했다. 제19대 조병창 회장 때는 후반기 이사장을 역임했다. 1995년부터는 제24대 뉴욕한인회장을 맡게 됐다.
한인회장 출마는 악성모기지로 운영이 어려워진 한인회관의 정상화를 위해서다. 지역한인회와 직능단체 등과의 공조를 통한 한인사회 위상정립도 한 이유였다. 회장재임 때 회관 부채상환 캠페인을 전개 30만 달러를 모금했다. 뉴욕총영사관도 뉴욕주재 한국기업들로부터 10만 달러를 갹출해 내는데 일조했다.
뉴욕한인회관의 악성 모기지 해결로 차압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이 그의 공적이다. 한인회관 독립채산제 기틀마련과 4만 달러의 흑자를 차기에 남겨주기도 했다. 한국의 경희의료원과 의료보험 계약을 체결하고 한인들의 모국 방문 중에 건강검진 등 의료해택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악성부채를 상환하고 차압위기를 벗어나 한인회관을 정상화 시킨 것을 보람으로 꼽는다.
■뉴욕뿌리교육재단의 산파
그는 평소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울판’이라는 조직을 통해 해외에 나가 있는 유대인 청소년들에게 언어와 문화, 역사를 가르치는 역할에 관심이 많았다. 전현직 한인회장들과 그런 내용의 의견을 자주 나눴다. 당시 뉴욕총영사 허리훈 대사도 전격 지원을 약속했다.
뉴욕일원 28개 단체장이 참석한 회동에서 밝은 사회 뉴욕클럽회장을 맡고 있던 그가 청소년 모국방문단 추진위원장으로 위촉됐다. 그해 40여명의 청소년들의 모국방문이 성사됐다. 국제교육진흥원이 경비 전액을 부담했다. 그 것이 뿌리교육재단 청소년 모국방문프로그램 시초가 된 셈이다.
뿌리교육재단의 산파역이었던 그는 창립회장을 맡았다. 허리훈 대사가 뉴욕마라톤 대회서 구간 마일 당 약정금액으로 모운 8만5,000달러를 전액을 기부한 것이 재단 출범자산이 됐다. 4년 동안 회장을 맡고, 지금까지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18차인 청소년 모국프로그램을 통해 모국방문 체험에 다녀온 학생들은 1.000여명이 넘었다. 그는 한인 2세들이 한국 가서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보고 찬란한 전통문화와 세계 첨단산업현장을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는 부모들의 열성이 높아지고 모국방문 후 한국어가 쑥쑥 늘며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는 청소년들이 늘어가는 것도 보람이다. 현재 한인사회의 지원과 재단 관계자들의 열성으로 청소년 모국방문프로그램은 물론 뿌리 포럼, 명문대 탐방 등으로 성장하는 재단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뿌리교육은 곧 역사교육이라 강조한다. 한국역사를 올바로 알아야 한민족의 우수성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자신의 뿌리를 올바로 알아야 미 주류사회에서도 코리언-아메리칸으로 당당히 살 수 있기 때문. 그래서 3월 예정인 뉴욕한인회 이민역사박물관 개관을 환영한다. 이민박물관을 뿌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할 수 있음이다. 뉴욕뿐 아니라 미전역과 세계 곳곳에 이민박물관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인 이유다.
그는 차세대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인재가 없으면 한인사회의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한인 2세를 키우는 것은 우리가 주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한인사회는 한마음 한뜻으로 한인 2세들의 인재양성에 나서야 한다고 당부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그는 가정교육은 ‘지식교육’이 아니라 ‘인성교육’이어야 하기에 1남1녀의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라고 가르친다. 돈과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 말씀처럼 정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1989년 뉴저지 가든교회 장로에 임직한 그는 현재까지 뉴저지 초대교회 장로로 봉직하면 튼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건강비결은 절제에 있다. 음식은 평소 소식한다. 생활 자체도 절제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신앙인답게 긍정적인 사고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친구와 지인들에게는 신뢰를 받고 후배와 자녀들에게는 존경받는 삶을 사고자 하는 그는 옛 성현의 좋은 말씀을 자신의 삶의 태도로 삼는다. 서예를 즐기는 이유다. 실력은 수준급이다. 2016년 제13회 한, 중, 일 대한민국 동양서예대전에서 특선을 할 정도다.
뉴욕한인회, 한인사회문제연구소, 뉴욕평통자문위원, 밝은 사회 뉴욕 클럽, 뿌리교육재단 창설 회장 겸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왕성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공로로 뉴욕주지사 소수민족지도자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상, 엘리스아일랜드상, 대한민국 국회의장 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오늘 이 시간이 최고의 삶이라 여기고 있는 그는 시간을 중요시 여기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것이 삶의 좌우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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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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