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둥둥 떠간다. 누구나 연말이 오면 “어머 벌써”를 연발하며 움찔 놀란다. 바람처럼 달려 가버린 세월 앞에 “무엇을 하였느냐” 라는 자책과 더불어 허무감 같은 것을 느낀다. 무언가 애석하고 마뜩찮고 언짢음 같은 것에 짓눌린다.
거기에 더하여 금년 고국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뉴스는 안타깝다 못하여 답답하다. 남의 이야기인 듯 던져버리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들을수록 혼란스러워 지친다.
우리 잠시나마 과감하게 일탈해보자. 성탄과 연말연시에 꼭 엄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즐거워야 한다. 암울한 화제를 바꾸고 우중충한 집안 공기를 털어내고 뱃속시원하게 웃어보고 싶다.
남상일과 박애리의 춘향가를 들어보자. 우리 같은 망향 족에게는 고전이 훨씬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허 둥둥 내 사랑/어허 둥둥 내사랑/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뒤로 걸어라 뒤태를 보자/ 앞으로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어허둥둥 사랑이야......
어허 둥둥 내 낭군/ 어허 둥둥 내 낭군/ 도련님을 업고 보니 좋을 호자가 절로 나요. ......//달아달아 둥근달아/ 네 아무리 바빠도/ 중천에 멈추어 있어/ 백년 여일 이 모양 이대로/늙지 말게 하여다오. ....”춘향전은 한국인의 근원정서가 나타난 대표적인 고전이다. 춘향전은 기록된 소설이기 이전에 설화와 판소리로 구연되었으며 개인이 아닌 민중의 집단적인 창작품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주제적인 면에서도 당대의 신분질서와 이념에 대한 수용과 갈등을 보여주면서 인간 해방이라는 주제에 닿아 있는 작품이다. 춘향전에는 학정 속에 사는 민초들의 한이 있어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좌절감에서 벗어나려는 고통이 있다.
글을 쓰면서 사랑이나 혹은 그리움 등을 묘사 할 때는 그 주된 단어가 숨겨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춘향의 사랑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벽지를 이룬다. 사랑이라는 추상명사가 숨 막히게 많이 불리어지면서 더 구성지고 맛깔스럽다.
우리의 혈관에는 창에 취하는 DNA가 숨어 있나보다. 우리만이 갖는 그 무엇이 있다. 남녀노소 모두가 뼛속까지 즐길 수 있다. 사랑가는 흥겨워 듣고 만 있을 수가 없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리듬 따라 춤을 추게 한다.
창을 듣고 있는 순간은 온갖 시름을 잊을 수가 있으니 이것은 속속들이 우리의 선연한 맥이며 숨결인 것 같다. 우리의 민속 교향곡이며 아리아다.
꽃길을 걸으며 어두운 마음을 달래듯 눈 내리는 밤 사랑가에 취하여 상한 마음을 달래는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랑가를 들으면서 손뼉을 치는 노파의 주름에 쌓인 선량한 얼굴을 상상해본다. 이렇게 따뜻한 감성으로, 극적인 감격으로, 창을 즐기는 어여쁜 내 민족의 내심을 본다. 창을 들으면서 얻어지는 위안이 얼마나 큰가를 경험할 수가 있다.
“죽으나 사나 형제여/ 당신의 그림자는 길고 여위다/그 변치 않은 그림자를 /황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고 /천장이 높은 파티에 참석한다” 마종기<두개의 일상> (평균율2) 의 부분.
재미 시인 마종기 님의 시를 읽으며 “죽으나 사나 내 형제여” 라는 대목에서 목이 멘다.
우리는 모국에 대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모국의 혼란 때문에 무거워진 재미한인들의 마음이 사랑가를 듣고도 치유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기다려보자. 그 허전한 구석은 새로운 행운이 들어찰 공간이다.
진정한 창의 발성은 심산 고초를 겪은 후에야 얻어진다 한다. 두고 온 고국은 지금 심산 고초의 언덕을 넘어가는 중인 듯싶다. 태평양을 건너와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에게 전하고 싶다. 훨훨 나는 세월에 시름을 실어 보내고 안온하고 참신한 명절이 되기를 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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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숙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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