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49)가 돌아왔다. 그의 말 그대로다. 영화 '밀정'에서 그가 연기한 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은 회색빛 인간이다. 이정출은 매번 기로에 서있다. 선택하는 것 같지만, 선택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인물이다. 그는 항일했고, 친일했다. 또 친일했고, 항일했다.
이건 그의 선택이 아니다. 그는 흘러간다. 흘러가면서 살기 위해 손에 잡히는 걸 쥘 뿐이다. "조선이 독립이 될 것 같냐"라는 말은 그렇게 나온다.
문제는 인식(認識)이다. 자신이 때에 따라 시시각각 옷을 바꿔 입고 있음을 스스로 안다는 것이다. 이때 슬쩍 고개를 내미는 건 자기 혐오 혹은 자기 연민 또는 자기 합리화다.
그래서 그는 생각에 잠기고, 눈빛은 흔들리며, 발걸음은 방향을 잡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눈물을 쏟는다.
새삼스럽지만 송강호는 이정출을 이렇게 살려내 관객이 기어코 느끼게 한다. 이 배우가 연기로 증명할 게 더이상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인간이 가진 내면의 그 무언가를 표현해내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다. 송강호는 이제 시대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예술이 아니겠냐"며 반문한다.
“미술로 치면…붉은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니고…회색빛…그 회색빛 시선으로 그 시대와 인물을 조망한다는 게 매력적이었던 거죠.”
-`이정출'은 복잡한 인물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그런 모습이 슬쩍 드러난다. 이 영화가 이정출의 영화가 될 거라는 것, 그의 흔들리는 마음이 이야기의 중심이 될 거라는 걸 암시한 듯하다.
“그렇다. 처음부터 배경을 까는 거다. 일본 제복을 입고 있지만, 마음 속에는 조선인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달까.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저 사람은 뭘까' 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저` 사람 뭔가 복잡한 얼굴인데, 저 표정 뭐지?' 이런 것들."
-이정출의 정체는 뭐라고 생각하나.
“이정출은 시대가 낳은 풍경이다. 복잡다단한 사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한 가지의 신념과 한 가지의 모습으로 살아가기에 그 시기는 대격변의 시대였다. 그 시대가 이정출이 아닐까. 이정출은 그 시대가 낳은 사생아다."
-이정출 캐릭터의 매력과 그 시대의 매력이 같은건가.
“일제 시대 자체가 매력이라기보다는 그 시대를 지나왔던 어떤 모습들이 매력적이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모습들. 그런 모습들은 영화적으로, 연기적으로 상당히 신선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 거다."
-이정출이라는 인물이 흥미로웠던 건, 이 사람이 시대를 근심하기보다는 철저히 자신의 생존 문제 혹은 개인적인 고뇌 안에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것은, 조선과 일본, 우리편과 적, 이러한 이분법을 가장 먼저 인식하게 한다. 물론 이 시기를 다루기 때문에 그런게 없을 수는 없겠지만, `밀정'이 다루는 건 그 시대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개인의 삶의 질곡이 아닐까 한다. 그게 또 밀` 정'만이 가진 감성일 것이다."
-이정출이라는 인물에게 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건 무엇이었나.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랄까.
“일본어였다.(웃음) 외국어를 한다는 것과 외국어로 대사를 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
제다. 그 인물 속에서 그 말들이 나오게 하는게 굉장히 중요했다. 일본어를 잘하고 못하고와는 다른 차원이다. 그 일본어가 이정출의 말, 이정출의 일본어로 들리게 하기 위해 일본어 대사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쳤다."
-눈빛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정출의 변화는 그 정도로 미묘하다. 따라서 연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촬영이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상당히 까다로웠다. 확실한 사건과 노선이 있다면, 배우로서 강력한 표현 방법을 사용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정출은 마음은 미묘하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동공이랄까.(웃음) 그런 것들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래서 또 매력적이었다."
-`밀정'을 두고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는, 이정출의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거다. 앞서 김지운 감독 또한 이 부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정출을 연기한 배우로서 이런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촬영을 하면서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얼마든지 일종의 계기
랄지, 사건을 만들 수는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다면, 그 시대를 관통하는 그 사람들의 생각과 고통이 얼마나 피상적인 게 되겠나. 그렇게 하면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너무나 작아져버릴 수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정출이 흔들리는 장면은 첫 시퀀스부터 나온다. 이후 사건이 진행되면서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켜켜이 쌓인다. 물론 관객에게 이런 것까지 다 봐달라는 건 연출을 한 김지운 감독이나 연기를 한 나의 욕심일 수는 있다. 그러나 더 큰 세계, 더 큰 인물,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이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목적으로 할 때 김 감독의 연출이 적절했다고 본다."
-어쨌든 `밀정'은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호평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내 영화를 두 번 보지 않는다. 이번에 언론 시사회 때 밀` 정'을 보고 나서 다음 날 일어났는데 또 보고싶더라. 내 영화라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니다.(웃음) 이상한 중독성이랄까.(웃음)"
-두 번 본 게 처음인가.
“`밀정'이 유일한 건 아니다. 아주 드문 경우라는 거다.(웃음) 왜냐면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자기 연기한 걸 또 보고싶어 하는 게 이상한 거다. 자신의 모자람과 부족함만 보게 되는 그 경험이 괴롭다. 또 어떤 연기의 잘잘못을 떠나 내가 한 걸 내가 보는 게 민망하지 않나.(웃음) 그런데 '밀정'은….(웃음)"
-왜 또 보고싶었다고 생각하나.
“되게 매력있달까…잘 모르겠다. 그런데 또 그런 느낌을 느끼고 싶다라는 것. 또 일단 영
화가 멋있다. 내 영화라서 그런 게 아니라 순순하게 든 마음이다.(웃음)"
<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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