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 심은경(22)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부산행’에 첫 좀비로 등장해 화제를 모으고, ‘서울역’도 순항하고 있지만, 그녀는 담담했다.“한없이 감사해요. 하지만 요즘 들어 벼가 익어갈수록 더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점점 더 새겨지는 것 같아요.” 심은경은 한 땀 한 땀 수놓듯 조심스레 답했다. 심은경은 요즘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민식 곽도원과 막 영화‘특별시민’ 촬영을 끝냈다
가출 소녀로 목소리를 연기한 ‘서울역’을 막 개봉시켰다. 독립영화 ‘걷기왕’ 촬영도 끝냈고, 하반기 ‘조작된 도시’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내년 초에는 ‘궁합’도 관객에 선보인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왜 심은경은 그렇게 달리고 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전화로 그녀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작품들을 연이어 계속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할 뿐이에요.” 아역으로 데뷔한 뒤, 성인이 돼 첫 주연을 맡은 영화 ‘수상한 그녀’ 성공 이후 사실 심은경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더랬다.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는 큰 상처로 남았다. 장르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선뜻 뛰어들었던 ‘널 기다리며’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지금도 안 좋은 평가를 안 받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이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죠. 그런 점들을 연기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심은경은 “처음에는 감당을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힘들면서 오히려 못 봤던 것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역’과 ‘부산행’은 심은경에게 터닝포인트였다.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를 극장에서 보고 난 뒤, 심은경은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그런 소감을 SNS에 남겼더니 연상호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서울역’ 목소리 연기 제안을 받았다. 쉽지 않은 역이다. ‘부산행’ 프리퀄인 ‘서울역’은 서울역 노숙자들로부터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지옥도다.
심은경은 가출 소녀 역을 맡았다. 가출해 남자친구와 싸구려 여인숙에서 살면서 원조교제로 생활비를 버는 역이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심은경을, 상상할 수 없다. 심은경은 “워낙 장르영화를 좋아해요. 좀비영화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라고 신나서 말했다. “예전이라면 내 욕심이 중요 했을텐데 지금은 좋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사실 우도임 언니가 맡았던 승무원 역할이 탐이 났었어요. 구두 한 짝만 신고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연상호 감독님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달라고, 또 특별출연이 맡기엔 역할이 맞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비록 짧게 등장하지만 ‘부산행’을 위한 심은경의 노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박재인 안무가를 8번 정도 찾아가 좀비 연기를 배웠다. 숱한 좀비영화들을 살폈다. 쉬지 않고 대화하며 좀비 연기를 연습했다. 연습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와 잠이 들 때까지 보고 또 봤다. 심은경은 “특별 출연이라고는 생각 안했어요. 그저 내 또 다른 보습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심은경은 “VIP 시사회 때 다시 봤는데 내가 보탬이 됐는지, 괜히 누를 끼친 건 아닌지, 더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더라구요”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부산행’ 흥행이 반가웠고, 그렇기에 좀비 연기에 대한 찬사가 말 할 수 없이 기뻤다. 심은경은 “이렇게 사랑 받아도 되나, 관심을 받아도 되나, 싶었다”고도 했다.
힘든 시기가 있었기에 자신에 대해 더욱 냉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니 힘든 시기가 있었기에, 칭찬에도 자신을 돌아보게 된 탓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산행’이 내 터닝 포인트라고 해요. 한없이 감사하고, 작은 역이라도 늘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마음을 더 먹었어요.” 심은경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스스로 하고 싶은 영화, 내가 하고 싶은 연기에 주력했던 게 컸다”면서 “어느 순간, 그럴수록 편협한 시각을 갖게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많은 작품에 쉬지 않고 참여하는 요즘, “많이 해서 채워 간다기보다 다양한 것들과 만나고 싶어요”라고도 했다. 독립영화를 해보고 싶단 생각에 참여한 ‘걷기왕’에선 심은경은 다시 고등학생 교복을 입었다.
한동안은 멀리했던 것이었다. 심은경은 “아역 이미지를 벗기 위해 한동안 학생 역할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구요”라고 말했다. ‘궁합’은 사극 로맨스라, ‘조작된 도시’는 액션이라, ‘특별시민’은 정치 장르란 점에서, 심은경에겐 도전이었다. 심은경은 “매번 할 때마다 배우는데요. ‘특별시민은 최민식, 곽도원 선배님과 같이 하면서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것, 알면서도 체감하지는 못했던 것들을 정말 많이 배웠어요”라고 말했다.
어느덧 심은경은 그렇게 커가고 있었다. 심은경은 “새로운 역할을 찾는다는 것보다 비슷한 캐릭터라고 해도 조금이나마 새로운 걸 스스로 보여줄 수 있는 걸 택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동주‘를 보고 윤동주 시집을 사서 곁에 두고 읽었다는 그녀는, 부끄러움을 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체득한 것 같았다. “스스로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을수록 고개를 더 숙여야 한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 날 때가 없는 것 같아요.” 오늘보다 내일이 더 궁금해지는 배우. 전화를 끊으며 심은경의 다음이 사뭇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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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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