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루이지 델 비앙코의 업적 정부기록에 등재
▶ 공사 책임자“유일하게 조각언어 이해” 공로 인정

국립공원국이 간과한 루이 지 델 비앙코 의 업적을 바 로 잡은 손자 루 델 비앙코. 뒤쪽에 포트 체스터에 세 워져 있는 할 아버지 기념비 가 보인다.

1930년대 마운 트 러시모어에서 인부들이 매달려 작업하고 있다.

마운트 러시모어 수석 조각가로 일한 루이지 델 비앙코의 작업하는 모습.

루이지 델 비앙코가 1921년 흰색 대리석으로 조각 한 자화상.
돌에 새겨진 것은 영원불변할 것 같지만 끈질긴 집념을 이겨낼 수는 없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돌 조각품 ‘마운트 러시모어’(Mount Rushmore)를 새기는데 공헌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조각가 루이지 델 비앙코의 후손들은 바위보다 더 단단했던 정부 기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2014년 ‘틈새의 조각: 루이지 델 비앙코의 안 알려진 이야기’(Carving a Niche for Himself: The Untold Story of Luigi Del Bianco)란 책을 쓴 더글라스 글래드스톤(Douglas Gladstone)은 “마운트 러시모어의 수석 조각가가 된 것은 이민자로서 가장 귀감이 될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말했다.
75년전 사우스다코타의 블랙 힐스 남동쪽 경사면 화강암 바위에 4명의 미국 대통령(워싱턴, 제퍼슨, 테어도어 루즈벨트, 링컨)의 얼굴을 조각해 넣는 일에는 수백명의 인력이 동원됐다. 그들은 디자이너 겸 수석 엔지니어인 굿존 보글럼(Gutzon Borglum)과 그의 아들 링컨의 지시 아래 힘든 사역을 마쳤고, 그들의 이름은 팀 노력의 부분으로 모뉴먼트에 기재되었다.
그런데 바로 지난 달 국립공원국(National Park Service)은 오래전 굿존 보글럼이 특별히 공로를 돌렸던 한 사람, 17세때 나폴리에서 미국으로 이민와 뉴욕주 포트 체스터에 정착한 돌 조각가 델 비앙코를 마침내 수석 조각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내셔널 파크 서비스의 페이스북은 최근 처음으로 델 비앙코의 타이틀을 공식 언급한 글을 다음과 같이 포스트 했다.
“예술가 루이지 델 비앙코는 돌조각 디자이너이며 엔지니어인 굿존 보글럼의 요청으로 마운트 러시모어에 일하러 왔다. 루이지 델 비앙코는 1933, 1935, 1936 그리고 1940년 시즌에 보글럼과 함께 일했다. 수석 시추공(Senior Driller)이었던 그를 보글럼은 1935년 7월말 수석 조각가로 임명했다”
국립공원국의 중서부 지역 디렉터인 카메론 숄리는 작년에 이 자리로 부임했을 때 델 비앙코의 손자인 루 델 비앙코(53)의 요청으로 그의 작업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숄리 디렉터는 루가 제공한 서류와 공원국 사학자의 조사를 검토한 다음 어떤 이유로든 마운트 러시모어 모뉴먼트에 남긴 루이지 델 비앙코의 업적이 간과되었음을 확신하게 됐다. 루가 제공한 서류는 보글럼이 쓴 것으로 루와 숙부인 세자르 델 비앙코가 의회 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이다. 거기에서 보글럼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이런 특수한 종류의 일을 맡기기 위해 내가 미국에서 찾아낼 수 있는 남자 세명의 몫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작업장에서 유일하게 조각가의 언어를 이해하는, 똑똑하고 유능한 돌 조각가이다”
델 비앙코는 1892년 프랑스의 르아브르 근처의 선상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던 부모가 배에서 그를 낳은 것이다. 베니스 북동부의 메두노에서 자란 그는 11세부터 베니스와 비엔나에서 석상 조각을 배웠다. 그는 미국에 있던 사촌으로부터 숙련된 조각가의 수요가 많다는 편지를 받고 버몬트로 이민 갔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를 위해 전투에 참가했고, 1920년 버몬트로 돌아가 마침내 포트 체스터에 정착했다. 거기서 동료 조각가가 그를 보글럼에게 소개했고, 보글럼은 코네티컷 주 노스 스탬포드에 있는 자기 스튜디오에서 일하도록 고용했다.
델 비앙코와 보글럼은 조지아 주 스톤 마운튼의 유명한 남부군 기념 조각과 뉴와크의 미국 전쟁 기념비의 작업에서 함께 일했다. 1933년 델 비앙코는 마운트 러시모어 프로젝트에 채용돼 나중에는 시간당 1달러50센트 혹은 주당 72달러를 받는 수석 조각가로 일했다.
수석 조각가로서 그의 우선 작업은 60피트 높이의 대통령 두상들에서 얼굴 표정을 섬세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제퍼슨의 입술에 난 1피트 깊이의 갈라진 틈을 패치하여 고쳤고, 링컨의 눈을 조각하면서 눈동자 동공 부분은 빛을 반사할 수 있도록 쐐기 모양의 화강암 돌을 사용해 하일라잇을 주었다.
델 비앙코는 1966년 ‘헤럴드 스테이츠먼 오브 용커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 두상의 모든 선과 마루, 각각의 작은 둔턱과 모든 세부사항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41년 보글럼이 사망했을 때 재정은 바닥이 났고, 허리부분까지 대통령들의 몸체를 조각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델 비앙코는 포트 체스터로 돌아와 그가 갖고 있던 묘비 조각하는 회사를 계속 운영했다.
그는 1969년에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규폐증. 돌가루 먼지를 너무 많이 흡입한 데서 온 병이었다.
“아버지 폐 속의 먼지가 바위덩이 같았기 때문에 의사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에 굉장히 놀랐다”고 딸 글로리아는 2012년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에서 말했다.
그의 업적이 간과된 공식 기록을 바로잡으려는 캠페인은 1980년대 후반 루이지의 아들 세자르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렉스 알렌 스미스가 쓴 ‘마운트 러시모어의 조각’(The Carving of Mount Rushmore)이란 책에서 자기 아버지의 역할이 무시됐다는 내용을 읽고 나서 이 일을 시작했으며 지난 2009년 조카 루에게 남은 일을 부탁하고 죽었다.
‘틈새의 조각’을 쓴 저자 글래드스톤은 마치 조 디마지오 이야기를 빼놓고 양키스에 대해 쓰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가족들의 요청을 무시해온 당국이 마침내 일을 바로 잡게 됐다며 크나큰 기쁨과 만족을 표했다.
루는 “25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국립공원국은 루이지 델 비앙코가 수석 조각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산에 남긴 업적의 영구적인 인정은 우리가 진실로 원하던 것이며, 바른 길로 나아가는 시발점이며 돌파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 The New York Times 특약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