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작가 메이플소프 작품전’ 게티·LACMA 동시 개최
▶ 이웃집 소녀 앤디스 러비의 회고 글
로버트 메이플소프.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1946∼1989)의 작품전이 지난 3월부터 오는 7월말까지 게티 뮤지엄과 LA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미서부지역에서 가장 큰 뮤지엄 두 곳이 함께 한 작가를 조명하는 전시를 여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것도 살아있는 동안 게이, 변태성욕자, 외설적 사진가로 낙인찍혔고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다. 메이플소프는 하셀블라드 카메라를 사용하여 에로틱한 누드와 꽃 사진, 노골적인 동성애 포즈, 유명인의 인물 등을 흑백사진으로 찍었다. 빛과 구성, 완벽한 인화를 통한 이상화된 미를 추구하는 그의 고전적 조형주의 사진들은 시간이 갈수록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고,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의 삶도 재평가되고 있다.
LA 타임스는 지난 달 28일자에 앤디스 러비(Andes Hruby)라는 오레곤의 여성작가가 그에 대해 쓴 글을 게재했다. ‘당신이 본 적이 없는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 그가 찍은 내 사진’이란 제목의 글을 요약 전재한다.
앤디스 러비.
내가 처음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만난 것은 1973년 첼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였다. 나는 네살이었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라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뉴욕에 있는 그 호텔은 우리 같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살기엔 딱 좋은 곳이었고, 나는 유일한 아이였다.
로버트는 늘 담배를 피우던 그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가 나의 관심을 끈 이유는 단 하나, 장난감 같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와 나는 훗날 1976년 여름 본드 스트릿의 길 건너에 사는 이웃이 되었다. 그때 그는 23세였으며 이후 10년 가까이 나는 매일 그를 보며 자랐다.
아버지가 죽은 후 나는 포드의 아역모델이 되었다. 금발에 푸른 눈과 흰 치아, 주근깨 있는 얼굴로 모델 오디션에서 뽑힌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 일에 나는 신이 났고, 친구들과 놀거나 숙제하는 대신 나의 저녁시간은 늘 아티스트 엄마와 함께 하는 전시 오프닝과 전위연극, 아방가르드 공연으로 채워졌다.
앤디스 러비와 엄마 이브.
나의 엄마 이브를 로버트는 에바라고 불렀다. 로버트와 그의 오랜 연인이며 후원자였던 샘 왁스태프는 휴스턴 스트릿에 있는 작은 우크라이나 식당 ‘오렌지 트리’의 붙박이었다. 에바는 하루 종일 브렉퍼스트를 서브하는 이곳에서 아티스트들에게 인기있는 웨이트리스였다. 식당 앞으로 택시가 나를 데리러 오면 나는 촬영지로 가서 머리를 예쁘게 말고 빳빳이 다린 속셔츠와 눈같이 흰 타이츠에 에나멜가죽구두를 신은 다음 아빠 모델에게 웃음 짓는 에이본(Avon) 향수 광고를 찍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 택시는 오래된 자갈길을 올라가지 않으려고 라파옛과 본드 코너에서 나를 내려놓곤 했다. 로버트네 집이 있는 쪽이었다. 그는 주로 비상계단에 나와 있곤 했는데 내가 지나가면서 손을 흔들면 “멋지게 차려입었네”라든가 “이 동네에서는 너무 화려한걸”이라는 코멘트를 날리곤 했다.
9세 때 나는 ‘컨테이너’라는 6인조 펑크 밴드의 보컬리스트였는데 그와 패티 스미스도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읊는 이 공연장에 오곤 했다. 모델 일로 질식할 것 같았던 나는 그런 공연을 통해 해방감을 느꼈고, 블론디, 더 폴리스, 엘비스 코스텔로, 조운 제트 같은 사람들이 공연하는 무대에 서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일이 없을 때 나는 에바와 함께 할렘 극장들에 가서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공연도 보고 ‘타운에서 가장 더러운 쇼’도 보면서 어린 나이에 부패와 풍자, 동성애와 퇴폐에 대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낮에는 글로리아 밴더빌트와 블루밍데일 광고 속의 예쁜 소녀가 되었다가 밤이면 엄마를 따라 성인클럽을 돌아다니는 나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로버트였다.
어느 날 아침 오렌지 트리에서 로버트는 엄마에게 사진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명예라든가 돈, 권력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도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그저 ‘예술계의 부적응자’라는 동지의식으로 부탁에 응했다.
굉장히 덥고 습한 1979년 7월 로버트는 하셀블라드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고 우리 아파트의 4층 로프트로 올라왔다. 3시가 지난 시각이라 벽에 그림자가 졌고, 해는 곧 허드슨강 너머로 질 것이었다. 그가 장비를 셋업하는 동안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나에게 로버트는 카메라를 어루만지며 “달에 갔다온 거란다”라고 말했다. 나는 샘의 선물인 그 카메라가 정말 달에 갔다온 줄 알았는데 같은 종류의 카메라가 아폴로 미션에 사용됐다는 뜻이었다.
낡은 스키니 청바지와 검은 부츠를 신은 그는 하셀블라드 뒤에서 머리를 검은 망토 속에 집어넣은 채 서있었다. 엄마와 나는 흰색 옷을 입고 저물어가는 빛에 서있었는데 그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텐트에서 나올 때마다 좌절의 한숨을 쉬었다. “틀렸어” 마치 어린 아이가 화가 잔뜩 나서 우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내려오는 햇빛을 바라보더니 그는 우리에게 “앉을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엄마는 방을 둘러보다가 로버트와 동시에 낡은 의자를 포착했다. 여기 저기 꿰맨 자국과 삐져나온 말털이 보이는 의자가 방을 건너 빛 가운데로 옮겨졌고, 로버트는 의자를 조금씩 앞으로 뺐다 뒤로 밀었다 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우리더러 앉으라고 했다가 다시 서라고 했다. 또 의자를 끌었고 우리는 다시 앉혀졌다. 그는 카메라 망토 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를 다른 방향으로 밀었다. 점점 지루해진 나는 의자에 쭈그리고 올라 앉았고 에바도 느슨하게 풀어졌다.
“로버트, 물 한잔 마셔야겠어요. 다음에 다시 해보는게 어떨까”
그런데 로버트가 우리를 돌아보더니 마치 지휘하듯 왼손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검은 캡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우리가 렌즈를 응시하자 둔탁한 하셀블라드의 셔터 소리가 철컥 들려왔다. 에바와 로버트는 축하의 담배를 피우러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바로 그때 내 방 꼭대기에 난 3개의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걸 보자 로버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에바, 당신 아이를 찍어도 될까요?” 엄마는 나를 쳐다보았다.
“웃으라고만 하지 않으면요” 나는 말했다. 로버트가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러 나간 사이에 나는 그가 찍은 수많은 누드사진을 생각하고는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돌아와서 나를 본 로버트는 너무 놀라서 공포스런 표정을 지었는데 그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오, 아니야, 속옷을 입으려무나” 그가 말했을 때 나는 큰 무안함과 모욕감을 느꼈다. 나는 공처럼 몸을 말아서 두 다리를 껴안고는 로버트가 시키는 대로 내 방에 생겨난 가장 복잡한 공간, 빛과 어둠의 중간으로 들어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로버트를 본 것은 13세때 1983년 여름 끝 무렵이었다. 필라델피아 근처의 기숙사 학교로 떠나는 나의 짐을 에바가 밴에 옮기고 있었다. 로버트와 샘은 프렙 스쿨로 떠나는 나를 축하해주러 왔다. 로버트는 내 어깨를 어색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어디에 가든지 우리 자신이 향상되는 좋은 길이 될거야”
메이플소프에 관한 수많은 복잡한 이력들이 올해 쏟아져 나오고 있다. HBO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게티와 라크마가 함께 전시회도 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발굴해낸 로버트의 수많은 미공개 스케치와 컬렉션 중에서 아직도 나의 사진은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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