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곽우천 미동부충쳥향우회장 겸 한국일보 배 제10회 테니스대회 대회장
축구 국가대표선수 어릴적 꿈...제2의 삶 찾아 미국행
봉제업체 인수, 가족같은 종업원들 덕분에 25년간 롱런
한인사회 남다른 애착, 봉제협회 회장으로 9년반 봉사
한국일보배 테니스대회 “테니스인들에 최고무대 선사할 것”
첫 인상은 마음 넉넉한 시골아저씨처럼 소탈하다. 옷차림은 겉멋 부리지 않아 소박하다. 말투는 꾸밈이 없다. 하지만 뿜어내는 열정은 강력하다.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인사회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거인인 셈이다. 그가 삶의 자세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긍정적인 태도. 긍정적이나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부정적이나 비관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취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만큼 엄청난 간격이 생김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곽우천(58) 미동부충청향우회장 겸 한국일보 배 제10회 테니스대회 대회장이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를 꿈꾸던 아이
그는 1958년 9월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방앗간 집의 4남1녀 중 3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공무원. 어려선 홍역을 앓았다. 4세 때는 오른쪽 다리에 골수염이 생겼다. 당시 어머니가 포목점을 하셔서 전주예수병원에서 골수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고향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경기도 동두천에서 건축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엔 운동신경의 뛰어나 축구, 농구, 탁구 등 각종 구기종 목 학교대표 선수로 활동했다. 그 때 장래희망은 축구 국가대표. 포지션은 골키퍼. 하지만 운동선수는 장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야 했다. 희망이 꿈으로 그친 이유다.
그는 지역 내 첫 인문계고등학교로 설립된 양주고등학교 2회 졸업생이다. 대학진학은 생업을 위해 포기해야 했다. 그 당시엔 어느 집이든 다르지 않았다. 대학공부를 접고 사회진출을 위해 군대를 먼저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골수염 수술 전력으로 그마저 무산됐다. 그래서 영등포에 있던 대한통운에 취직했다. 3년 정도 차량정비부서에서 일했다. 그러다 주택건설을 하던 아버지 사업을 돕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당시 건설경기가 점점 나빠졌다.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했다. 1985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 제2의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그는 ‘어렸을 때는 축구 골키퍼 국가대표가 되고 싶어 열심히 운동했다. 비록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지금도 축구를 좋아한다. 동두천은 고향을 떠나 학창시절은 물론 미국 오기까지 살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인 셈이다”라고 말한다..
■봉제는 나의 아메리칸 드림
그는 1985년 뉴욕에 왔다. 맨하탄 봉제업체에서 매니저를 하던 매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봉제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룸메이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아 홀로서기에 나섰다. 한인 주력업종인 야채가게, 건설업계, 브로드웨이 도매상, 생선가게 등에서 밥벌이를 하며 경험을 쌓은 이유다.
1년여 동안 별거 다 해봤지만 결국 봉제업체에 입사했다. 3년 동안 봉제기술과 업체운영의 노하우를 배우고 봉제업체를 인수해 직접운영에 나섰다. 매뉴팩처로부터 여성드레스, 자켓 등의 제품을 하청 받아 40여명의 종업원과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3년여 동안 업체운영에 관한 시행착오로 종업원 주급이 몇 주 밀릴 정도로 운영난을 겪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의 부모에게 운영자금 지원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초심으로 돌아가 재기를 모색했다, 다행히 2년여 동안 종업원의 밀린 주급을 다 줄 수 있을 정도로 점차 나아졌다. 그 후 정상궤도에 올라서면서 원만하게 비즈니스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상의 품질과 철저한 납품기한 준수 등을 통해 매뉴팩처와 ’신용‘으로 돈독한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꼽는다. 또 주급이 밀려도 이해해 주던 종업원들 덕분으로 여긴다. 봉제업체를 시작해 현재까지도 10여명의 종업원이 25년 동안 여전히 일하고 있다. 종업원과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처럼 봉제업계가 기존업체의 80% 이상이 폐업할 정도로 극심한 불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신용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두고 일을 만들어 가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고객과 함께 커 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뢰를 먼저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업체운영에 있어서 고객만족이 최우선인 만큼 그에 따른 철저한 양질의 품질관리를 할 수 있어야 새로운 고객과도 오랜 기간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는 봉제를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으로 여긴다. 미국에서의 행복한 삶이 바로 봉제 그 자체란 의미다.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1990년 봉제업체에서 일하면서 우연히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여자 친구를 만나 사랑스런 아내로 맞이한 것을 꼽는다.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자 행복이 봉제로 인한 인연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또한 봉제업체를 운영함으로써 넉넉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기에 ‘나눔’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공한 사람보다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그의 삶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왕성한 한인사회 활동
그는 언제나 분주하다. 하는 일이 워낙 많다. 당연히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무장한 채 끊임없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봉제협회와 인연을 맺었다. 부회장을 2번 역임한 경험을 토대로 제16대 회장에 취임했다. 회장에 나서는 사람이 없어 협회운영이 어려울 때에 ‘협회의 존재감’을 되살리기 위해 나섰다. 그 후 19대까지 9년6개월 회장직을 수행했다. 장기집권(?)하면서 친목도모와 단합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했다. 세미나를 열어 회원 보호차원에서 제반법규 및 단속에 대한 적절한 대응방법을 안내했다.
한인패션 2세들을 후원하고 한인패션이 주류가 되도록 패션장학생도 선발했다. 패션의 미래지향적인 접근을 하고자 30년 사용했던 봉제협회 명칭을 한인의류산업협회로 바꾸었다. 한국의 패션과 섬유업계를 뉴욕에 알릴 수 있도록 ’뉴욕 코리안 패션 페스티발‘ 행사도 2회에 걸쳐 개최했다.
그는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과 한인 정치인 배출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테렌스 박 뉴욕시의원 후보 후원회장과 존 리우 뉴욕감사원장 한인후원 회장을 지냈다. 정승진 제16지구 뉴욕주 상원의원 후보 공동후원회장도 맡고 있다.
현재는 각계각층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충청인들을 규합하여 친목도모와 더불어 한인사회 봉사활동 확대를 목표로 미동부충청향우회 제15대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오는 7월23일 열리는 뉴욕일원의 모든 테니스 동호인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명실상부한 한인 테니스 제전인 한국일보 배 제10회 테니스대회의 대회장으로서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는 ‘올해로 10년째인 이번 대회도 뉴욕, 뉴저지 일원 테니스 동호인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선사하는 대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며 적극적인 참가와 관심을 당부했다.
그가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한인사회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어서다. 무엇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묵묵하면서도 강한 근성과 끈기로 남다른 열정이 있기에 항상 좋은 결실을 맺는 편이다. 언제나 한인사회 각종행사 책임자로서 섭외 1순위인 이유다. 뉴욕한인회장 선거 때마나 회장후보 1순위로 거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어떤 일이라도 한인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큰 보람이다.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일은 열정적으로 펼쳐나가겠다”고 귀띔한다.
■‘No'를 모르는 남자
그의 삶의 좌우명은 사람답게 사는 것, 참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남의 맘에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이유다. 행복은 욕심 없이 현실에 만족하면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는 결혼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이성간의 만남이며 인생은 행복한 삶이라 여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언제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는 아내에게 늘 감사하고 있다“며 ”앞으로 남은 인생은 아내와 가족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골프는 취미 성경읽기는 습관이 되고 있다는 그는 ‘아침운동과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라고.
지인들은 그를 ‘NO'를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남의 요청을 해오면 거절을 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그러다보니 종종 경제적 손실을 볼 때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No'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는다. 비록 손해를 볼 때도 있지만, 악한 사람은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마음 때문에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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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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