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때문에 잠이 깬 것인지, 잠이 깼는데 빗소리가 들려 뒤척거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일어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창문틀에 둔탁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나를 조르던 잠은 조금씩 익숙해진 어둠 사이로 숨어 버렸다.
지붕 위를 미끄러져 물받이 통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온 몸 구석구석 지나가는 실핏줄을 따라 천천히 흐른다. 어둠속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흠뻑 비를 맞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말갛게 세수한 얼굴로 아침을 맞았다. 뒤뜰 숲 속 깊숙이 감추어 둔 비안개가 아늑한 어머니의 자궁같이 푸근하다. 어느새 봄은 숲 속의 크고 작은 가지마다 연두 잎을 걸어 놓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달라지기를 고대하던 나무들의 기다림을 눈치 챈 5월의 햇살이 고사리 손 같은 나뭇잎 사이에서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담벼락에 기대어 위태롭게 자리를 잡고 민들레가 피었다. 아스팔트의 갈라진 틈새에 싹을 틔운 새 생명도 가느다란 꽃대를 세워 놓았다. 어디에서 날아 든 홀씨인지 궁금했고, 어떻게 한줌의 흙도 보이지 않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꽃까지 피워 냈는지도 대견 했다.
오래 전에 누군가가 걸었던 길, 그 텅 빈 풍경 속으로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을 마음으로 따라 걷는다. 문득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 길을 걸었는지 묻고 싶어졌다.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도 그 누군가처럼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대답했을지 모르겠다. 내가 두고 온 먼 길을 담벼락 사이의 민들레가 되어 자꾸 뒤돌아본다.
유리벽의 안과 밖에서 하루가 오고, 또 갔다.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시간은 내게 단 한 번도 느린 걸음으로 너그럽지 않았다. 다가오는 것들만 간신히 붙잡아 두기에도 너무 짧은 그 하루가,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감정을 따라 휘청거린다. 매일 얼마나 많은 마지막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문 앞에서 손 흔들며 나를 배웅해주던 어머니의 미소, 화장대 거울에 매달린 빛바랜 종이 카네이션, 당신이 다녀갔을 바닷가의 발자국과 당신의 말에 귀 기울였던 어린 아들, 흑백 영화 같은 오래된 기억에 고운 색깔을 입혀 간직하기로 한다. 아침 해가 그려놓은 산 그림자처럼, 저녁노을이 번진 강물처럼….
오래전 알래스카 여행 중에 가이드한테 들은 연어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미 연어는 알을 낳은 후 그 곁을 지키고 있는데, 이는 갓 부화되어 나온 새끼들이 아직 먹이를 찾을 줄 몰라 어미의 살코기에 의존해 성장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어미 연어는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며 새끼들이 자신의 살을 마음껏 뜯어 먹게 내버려 둔다고 했다. 새끼들은 그렇게 성장하고, 어미는 결국 뼈만 남아 죽어가면서 세상의 가장 위대한 모성애를 보여준다고 설명해 주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알래스카를 떠올리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붉은 연어 떼 보다 더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이야기다. 아마 모성에 대한 통렬한 회한이어서 더 아프게 와 닿은 듯하다. 하루 일을 마친 해가 앞 산 능선을 천천히 기어간다. 그 산을 넘어가는 새가 저녁 하늘을 노래하며 날아가고. 교회의 종소리가 새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며 울려 퍼진다. 어머니가 서 계시던 바닷가에도 저녁이 왔을까?
'어머니, 당신은 섬입니다. 등 돌린 지 오래되어 당신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바다가 있지만 멀리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당신은 섬입니다. 울음을 삼키면 어둠이 된다고 했던가요? 등 돌린 이쪽을 향해 그림자로 서 있는 당신은, 가슴시린 섬 입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풍경 속에 묻혀 풍경이 되어버린 내 어머니. 닿지 못하는 곳에 하얀 등대로 서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으로 쓴 편지를 허공에 읽는다. 내 아이들이 아 아내를 위해 꽃을 사 들고 온 어머니날에.
<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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