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요사이 우리 합창단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고 있다. 담담하게 가사를 읽어보면 고국산천의 가을들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심오하다.
이 민요는 녹두장군 ‘전봉준’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이다. 전봉준의 별명이 녹두장군이기에 녹두꽃은 ‘전봉준’을, ‘녹두밭’은 농민군을, ‘파랑새’는 청나라군대 혹은 당시 푸른색 군복을 입었던 관군이나 군모를 썼던 ‘일본군’을, ‘청포장수’는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녹두장군이 죽으면 백성들이 울고 간다는 뜻이 된다. 잔잔하게 마음을 흔들어 주는 뜻 깊은 노래다.
나는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고 있으되 마음은 만리 밖을 달리고 있었다. 휘어~휘어~ 어린 시절 어느 날의 모습을 떠 올리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우리 산의 밑자락 끝에 밭이 있었다. 매해 그 밭에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차조를 심었다. 하늘은 푸르고 가을바람은 살랑거리며 조는 녹갈색으로 익어서 탐스러운 고개를 무거운 듯 숙일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나더러 그 밭에 새를 보러 가라는 것이었다.
할머니 명이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언제나 입을 꼭 다무신다. 전혀 새를 보러 가본 일도 없는 나를 불러서 가라시는데 왠지 나는 들떴다. 일탈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재미가 옹실옹실 할 것 같았다.
누구인지 기억은 없으나 둘이서 갔었다. 밭둑에 멍석을 깔고 신을 벗어 나란히 놓아두고 소꿉장난을 하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보니 새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신나게 만찬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댓바람에 일어나서 맨발로 자갈길을 뛰어가며 휘여~ 휘여~를 외쳐댔다. 진도아리랑을 부를 때의 신명나는 어깨춤이듯 멋진(?) 동작으로 휘어 휘어를 외치는 중이었다. 어찌 그리도 흥겹던지, 유유히 창공을 나르며 원을 그리는 큰 새가 되어 신들린 듯 끼를 발산하고 있는 판에, 3~4 미터 바로 앞에 낯모르는 세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나는 죄를 짓다가 들킨 꼴로 그 자리에 우뚝 선 돌비석이 되고 말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얼마나 부끄럽던지, 스르르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더구나 꼭 내 또래의 서울 아이인 듯한 예쁜 애가 꽃무늬 원피스에 모자를 쓰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애 아버지는 넥타이를 맨 젊은 신사였으며 엄마 또한 대단한 멋쟁이였다.
그 앞에 나는 무명 몽당치마에 맨발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무엇보다 춤을 추다 들킨 것이 창피스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유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김빠진 풍선 꼴이 되어 멍석 위에 누웠다. 그리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있어.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오신 세라복도 있고 운동화도 있고 학교 갈 때 짊어질 빨간 책가방도 준비됐거든. 우리 아버지도 감색 양복에 넥타이 매고 다니셔. 우리 어머니도 잔치 집에 가실 때는 유땡 치마에 양단저고리를 입고 제일 예쁜 멋쟁이란 말이야. 서울에서 온 너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늘을 향하여 오기를 내뿜으며 나의 평화를 기습당한 분노를 달랬었다. 내 앞에서 오만을 떨지도 않았고 착하게만 보이던 예쁜 아이,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아이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다.
지금은 그 밭도 저수지 속으로 수몰되었고 행복했던 내 어린 그날의 부끄럼만이 앙금으로 남아서 감미로운 추억이 되고 있다. 높은 하늘과 맑은 햇빛아래 새 같이 날고 싶었던 나, 안무를 하듯이 혼자 동작을 지어내며 뛰어놀던 소녀가 몇 개의 산과 강을 건너고, 바다를 넘어 여기 먼 이국땅에 와서 살면서 내 뿌리를 그리고 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지금도 남아있는 옛집을 확인하고 선산에 누워계신 부모님을 뵈러간다. 가슴이 뭐라고 속삭이지만 할 말을 다 할 수는 없는 게 삶이라고 입을 꼭 다물고 비탈을 내려오곤 한다. 나는 지금도 그 고향을 업고 안고 산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