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
“이 박물관 건물은 원과 그리고 곡선의 미를 살린 건물입니다. 인디언들은 원의 세계가 그들의 철학이었고 원의 세계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건물은 석회암으로 지었고, 황토색으로 되어 자연 친화적인 맛을 내고 있지요.”
이 비옥한 미국 땅에서 어째서 몇 천 년을 추장사회에서 국가로 발전되지 못 하였을까? 어째서 신전이나 왕의 궁, 무덤 같은 것, 하다못해 저수지, 수로 같은 관계시설 조차 없는가? 도대체 농경사회가 이루어져 있었나? 이것의 해답을 얻고 싶었다.
늑대와 함께 춤을 내가 처음 인디언을 본 것은 영화에서다. 그 인디언이란 백인 배우들이 분장하여 출연한 것이라 사실 인디언도 아니었다. 더 한심한 것은 백인들이 평화를 찾아 서부로, 서부로 포장마차를 타고 가는데, 인디언들이 ‘웨-웨’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쏘고 쳐들어온다. 그러면 천사표(?) 백인들이 마차를 원형으로 방어벽을 만들고 총을 쏘며 방어를 한다. 그리고 신통하게 죽지는 않고 팔과 어깨에 화살을 맞고 부상만 당한다. 그리고 위기일발일 때, ‘따따라-따’ 하는 나팔소리와 함께 기병대가 구원하러 나타난다. ‘바보 같은’ 인디언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고…. 그러면 극장에 앉아있던 나를 비롯한 관객들이 힘껏 박수를 친다. 할리우드 사람들의 이러한 유치한 영화 만들기가 좀 미안했는지 조금 발전해서 백인 남자가 부상을 당한다. 인디언 처녀가 동족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극진한 치료를 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 인디언 처녀는 끝내 죽어야 하지만….
이러한 영화를 만들다가 시간이 지나서 잭 니콜손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이상한 인디언을 등장시키기도 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케빈 코스트너가 출연한 ‘늑대와 함께 춤을’에서와 같이 타코다에 사는 인디언 수우 족과 어울리며 사람대접을 하는 영화까지 발전되기도 했다.
마침내 1803년에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주를 1,500만 불에 살 때에, 프랑스 인과 결혼하여 2살 된 아이의 어머니인 쇼쇼니 족의 사카가위아가 루이지애나 탐험대에 아이를 업고 합류하면서 큰 공을 세운다. 그래서 주페 공사가 그녀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1불짜리 동전을 만들었다.
자기들의 만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미국의 위대함 아니겠는가
원의 철학그 동전을 생각하다가 인디언 박물관 앞에 차를 멈추었다. 박물관에서는 인디언들을 얼마만큼 대접했을까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10시15분 전쯤 도착하면 가까운 곳에 주차가 쉬울 것이라 계산하고 왔는데 오는 도중 길이 막혀 10분이 늦었다. 10시 정각에 문화기행에 참여하기로 한 황휘섭 사진작가를 만나기로 한 첫 번째 약속인데 말이다. 겨우 주차를 하고 박물관 정문에 들어서니 황 작가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첫 마디가 역시 사진작가다운 코멘트이었다. “이 박물관 건물은 원과 그리고 곡선의 미를 살린 건물입니다. 인디언들은 원의 세계가 그들의 철학이었고 원의 세계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건물은 석회암으로 지었고, 황토색으로 되어 자연 친화적인 맛을 내고 있지요.”하지만 나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나의 문화기행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이미 이곳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질문을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왜 인디언사회는 왕조국가로 발전 못했나 역사학자들은 인류 공동체 사회의 발전을 ‘무리’ ‘족장시대’ ‘추장 시대’ ‘왕의 국가 시대’로 생각한다. 원숭이, 침팬지와 같이 몇 십 명의 무리를 지어 살다가 ‘종족’시대가 열렸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종족시대의 족장이었다. 그러다가 한 핏줄의 종족이 몇 개 모여서 추장 시대에 들어선다. 추장은 피를 나눈 종족들만이 아니라 몇 개의 종족들이 섞여 살아가야 하기에 질서를 지키도록 해야 했고, 외부로 부터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특징적인 것이 이제 누가 추장인지 모두 알게 해야 했다. 대부분은 머리 장식을 했다. 인디언 추장의 머리에는 하늘(신)과 교통, 그리고 힘의 상징인 독수리 깃털 같은 것으로 머리 장식을 했고,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표범이나, 사자 머리를 쓰기도 했다.
이 단계에서 생산과 인구가 늘어나고, 그리고 생산된 식량의 저장이 늘어나면서, 식량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문직으로 살 수 있게 되는 소위 ‘국가’가 탄생한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 구리와 쇠 같은 금속 생산 전문직, 외부침입을 막는 군사, 생산을 배가하기위한 저수지 같은 관계시설을 지휘하는 자, 세금을 걷어 들이는 세리 등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비옥한 미국 땅에서 어째서 몇 천 년을 추장사회에서 국가로 발전되지 못 하였을까? 어째서 몇 천 명이 동원되어 짓는 신전이나 왕의 궁, 무덤 같은 것, 하다못해 저수지, 수로 같은 관계시설 하나 조차 없는가? 도대체 농경사회가 이루어져 있었나? 이것의 해답을 얻고 싶었다는 말이다. 현재의 이 비옥한 땅을 보면서 말이다.
토마호크 도끼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박물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벗어났다. 그건 인디언의 개념이었다. 현재의 미국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남미대륙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첫 번째 만남은 기원전 250년부터 기원 후 250년쯤의 것으로 추정되는 흙으로 빚은 중남미 에콰도르의 여인조각이었다. 얼굴 표정은 깊은 우수보다 신라의 반가유상처럼 은은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어서 남미 페루의 꽃병, 미시시피 지역에서의 접시, 항아리, 그리고 사우스타코다에서 수집된 모카신이었다. 이 모카신은 1890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고 소가죽으로 만들어졌으니 시대적인 면에서 다른 전시품과는 어울릴 수 없는 것 같았다. 또 우리에게 미사일 무기로 익히 들어온, 인디언들에게 무기로 널리 사용되고 또 그들 간에 최고의 선물로 여겨졌던 토마호크 도끼 역시 1850년도 제품이라 하니 그 도끼의 금속이 이곳으로 이주해온 서양문명의 산물인 듯해서 이 역시 같이 전시되는 것이 어색해 보였다. 인상적이라고 할 ‘평화를 염원’이라는 십자가가 가운데 있는 Diego Ronero(1964 년생의 유명한 미국의 세라믹 아티스트)의 ‘Wana’s Dream‘이란 작품을 보고나서 4층의 전시장으로 올라갔다. 황 작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아래를 내려다보란다. 역시 원형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미국엔 소도 말도 없었다콜럼부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했을 당시 미국 남북 전체에는 약 2,000정도의 추장이 이끄는 사회였다. 오늘의 미국 땅에는 202개의 종족과 약 300여종의 언어가 있다 한다. 그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북쪽 추운지방부터, 남미의 잉카 문명까지 여러 개의 전시장으로 나누어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한 전시실에서 이 지역에 살던 동물 박제실을 보았다. 역시 가축동물은 없었다. 말은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들로 부터 도망쳐 평야를 돌아다니던 야생마(머스탕)를 잡거나, 아니면 훔치거나 하면서 버펄로 사냥에 쓰기 시작했고, 백인들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 1680년대 푸에블로 인디언이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이다. 소 역시 유럽인들이 들여온 것이다. 어째서 미 대륙에는 가축화할 동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시작하면서 추장시대에서 왕국으로 발전이 안 된 이유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같은 온도, 강우량과 기후의 교류가 동서로 이루어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산맥이 방해를 했고, 중간에 낀 사막과 강의 흐르는 방향도 도움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밀, 보리, 벼 같은 곡류가 없고 그저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심어야 하는 옥수수밖에 없어서 농경시대 진입이 어려웠다. 어쩌면 버펄로 같은 먹이 사냥의 생활로 조금 이동만 하면서 사냥을 하면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몇 천 명 이상의 인구가 함께 산다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다. 그래서 추장 사회로 남았다. 글쎄 이것이 나의 짧은 지식으로 전부인 듯싶다.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음 방으로 갔다.
만행의 기록 다음 방에서 전율했다. 위대한 미국의 저력을 보았다. 유럽인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영국인들이 첫 번째 지금의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 지역의 Lenepe 족과 맺은 불평등 조약부터,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1830년 체로키족을 강제로 오크라호마 지역으로 내몰면서 15,000명 중에서 4,000명이 죽게 한 사건, 또 1831년 전유법이란 명령으로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이란 창살 없는 감옥에 살도록 묶어 놓아, 이제는 그저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하고 현재에는 겨우 150만 명이 남아 있게 한 유럽 이주민들의 만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 진실을 외면하지도 숨기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만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것이 미국의 위대함이 아니겠는가? 독일의 유태인에 대한 사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잔혹 행위를 밝히는 미국의 솔직함, 반면 일본의 발뺌의 현실을 보면서 무엇이 진정 위대하고 미래가 있는 나라인가를 생각하면서 인디언 박물관 탐방을 끝냈다.
이 영 묵
미주 서울대 총동창회장 역임
워싱턴 문인회 회장 역임 한국 소설가협회 회원
황 휘 섭
한국 사진작가협회
워싱턴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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